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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님의 서재
  • 서양 중세 상징사
  • 미셸 파스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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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15
  • : 876

머리말 중세의 상징


"상징에 관한 고유한 연구에도 몇몇 뛰어난 업적들은 존재하지만 대부분 신학이나 철학과 관련된 매우 사변적인 차원에 제한되어 있거나, 표장과 표장체계의 세계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렇지만 중세에 표장embleme과 상징symbole은 서로의 경계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달랐다. 표장은 명칭, 가문의 문장, 도상학적 징표처럼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호였으나, 상징은 육체적인 인격이 아니라, 추상적인 실체·이념·관념·개념 등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기호·형상·사물은 표장이자 상징으로서의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프랑스 국왕의 상징물regalia이던 [상아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인] 정의의 손main de justice 같은 것이다. (다른 군주들은 결코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프랑스 왕의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그를 다른 군주들과 구별해주는 표장의 성격을 지닌 소지품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프랑스 군주제에 관한 어떤 특정한 관념을 나타내던 상징적 사물이기도 했다."(13-4)


# 중세의 상징 체계

1. 어원론 : '기호의 자의성'은 중세 문화와는 관련이 없다. 가령, 호두나무의 라틴어 이름인 '눅스nux'는 '해를 끼치다'라는 뜻을 가진 '노케레nocere'와 관련 있다고 생각되었고, 사과나무의 라틴어 이름인 '말루스malus'는 '악malum'이라는 단어를 연상시켰다.

2. 유추 : 두 개의 낱말이나 관념, 사물 사이의 유사성 또는 조응관계(통상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에 기초해 나타났다. 가령, 우리가 차가운 색이라고 여기는 파란색은 중세에는 공기의 색이고, 공기는 따뜻하고 건조한 것이었기 때문에 따뜻한 색으로 여겨졌다.

3. 차이 : 어떤 목록이나 집합 안에서 한 대상이 다른 것들과 미세한 차이를 보일 때 거기에 가치와 의미가 부여된다. 가령, 뿔은 불안을 유발하는 악마적 표상이지만, 모세는 (오역에서 비롯한) 뿔 덕분에 칭송받는 존재이자, 뿔이 있는 것들 가운데 으뜸인 존재가 되었다.

4. 부분과 전체 : 소우주-대우주 관계처럼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존재의 모상이었고, 부분은 전체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가령, 성유물에서 뼛조각 하나, 이빨 하나는 성인의 전신에, 왕관과 인장은 군주를, 흙덩이 하나, 짚단 하나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봉토 전체를 나타냈다.


"중세의 모든 상징체계에서 여러 요소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전체는 개개의 요소들의 고립된 의미의 총체보다 언제나 더 풍부한 의미를 품고 있다. 예컨대 사자의 상징체계는 글에서도, 도상에서도, 기념비 위에서도 고립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독수리·용·레오파르두스 등과의 관계에서 비교해 보아야 더 풍부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중세의 상징은 이런저런 낱낱의 의미보다 작용방식에 따라 특징이 정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색을 예로 들면, 빨간색은 열정이나 죄악을 의미하기보다는 (선이든 악이든) 격렬히 작용하는 색이다. 그리고 녹색은 단절과, 재생 이후의 혼란의 원인이 되는 색, 파란색은 고요함과 안정을 가져오는 색, 노란색은 흥분과 위반을 일으키는 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용방식을 의미작용의 규칙보다 우선시하면 역사가는 상징의 양면성을 유지할 수 있다. 모호함 그 자체인 양면성은 상징의 가장 깊은 본성의 일부를 이루며, 상징이 잘 기능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26)


"중세 상징체계의 핵심은 기독교 세계가 시작된 뒤 5~6세기의 기간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무에서ex nihilo' 몇몇 신학자의 상상으로 생겨나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의 여러 가치체계와 감수성의 양식 등이 뒤섞여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 분야에서 중세 서양은 3개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하나는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성서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로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야만' 세계, 곧 켈트·게르만·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해 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서양 중세는 1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여기에 독자적인 층들을 덧쌓았다. 사실 중세 상징체계에서 완전한 배제는 결코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모든 것이 여러 층으로 겹겹이 쌓였고, 그것들이 몇 세기를 거치며 서로 뒤섞였다. 그래서 원형에 기초하고 보편적인 진실에 속하는 상징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 세계의 모든 것은 문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27)


1부 동물과 식물


1 동물재판


"동물재판은 13세기 이후 서양의 다양한 지역들에서 목격된다. 세속사회나 교회의 재판소로 끌려 나온 온갖 동물재판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남자나 여자, 아이를 죽이거나 심한 상처를 입힌 돼지, 소, 말, 당나귀, 개와 같은 개별 동물과 관련된 재판이다. 이것은 형사재판으로, 교회 권력이 개입하지 않았다. 둘째는 집단으로 다루어지는 동물을 대상으로 한 재판이다. 어떤 지방을 황폐하게 만들거나 주민을 위협한 (멧돼지·늑대 같은) 대형 포유류나 (설치류, 벌레, '해충'처럼) 더 빈번히 발생해 농작물을 해치는 작은 동물들과 같은 경우이다. 이것은 재해인데, 전자는 세속권력이 조직한 사냥몰이꾼이 몰아냈고, 후자는 교회가 개입했다. 교회는 악마를 쫓는 의식에 호소했고, 신의 저주를 내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나아가 교회로부터 추방하고, 파문을 선고했다." "마지막은 수간이라는 큰 죄악과 관련된 동물을 상대로 한 재판이 있는데, 대개 소송서류가 죄인과 함께 소멸되어 연구하기 어렵다."(44)


"동물은 언제나 어떤 점에서 본보기의 원천이 되었다. 사법의 영역에서 동물을 재판소로 보내고, 심판하고, 단죄하거나 무죄로 풀어주는 것은 재판이라는 의례가 지닌 본보기로서의 성격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보마누아르의 생각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정의'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기능커녕 오히려 '바람직한 정의'의 작용을 위해 꼭 필요한 행위였다. 어떤 것도 '바람직한 정의'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고, 동물도 예외는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법의 주체인 것이다." "동물을 대상으로 제기된 소송들은 실질적으로 의례화된 일종의 교훈예화였다. 거기에서는 바람직한 정의의 완벽한 실천이 심문 절차에 힘입어서, 나아가 모든 의례적 요소에 맞추어 매우 사소한 부분까지 철저히 연출되었다. 더구나 다른 사례에서는 증인이 매수되거나 피고가 죄를 부인하거나 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지만, 이 재판에서는 정의가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오롯이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52-3)


2 사자의 대관식


"상징의 차원에서 사자는 애매모호한 동물이었다. 사자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었으나 나쁠 때가 더 많았다.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교활하고 무례한 사자는 악의 세력, 이스라엘의 적, 폭군과 사악한 왕들이 구현된 것이었다. 「시편」과 예언서들은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신의 보호를 간절히 빌며 달아나야 하는 위험한 동물로 사자를 나타냈다. 「시편」의 작가(다윗)는 〈사자의 입에서 저를 구해주소서〉라고 간청했고, 중세 초의 수많은 작가들도 되풀이해서 그렇게 기도했다." "그렇지만 그만큼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성서에는 좋은 사자도 있었다. 공익을 위해 자신의 힘을 쓰는 사자의 으르렁거림은 신의 말을 나타냈고, 가장 용감한 동물인 사자는 유대 부족, 가장 강력한 이스라엘을 상징했다. 이런 점에서 사자는 다윗과 그 자손들, 심지어 그리스도와도 연관되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부족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62)


"사자가 이렇게 그리스도적인 성격을 뚜렷하게 나타내며 수많은 영역에서 지위가 높아지자, 신학자와 예술가들에게는 까다로운 질문 하나가 던져졌다. 이 동물이 지닌 부정적인 요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동물지 작가들, 표장·상징 제작자들의 해결책은 나쁜 사자를 완전히 다른 동물로 만들었다. 그들은 나쁜 사자에게 독립된 이름과 특성을 부여해 그리스도적인 사자와 혼동되지 않게 했고, 사자는 동물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배설구' 노릇을 한 동물은 레오파르두스Leopardus였다. 그 동물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표범이 아니라, 상상의 표범이다. 레오파르두스는 (갈기를 제외하고는) 사자의 겉모습과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타고난 본성이 사악하다고 여겨졌다. 12세기 이후 문학작품들과 초기 문장들에서 레오파르두스는 자주 타락한 사자, 반쪽짜리 사자, 사자의 적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 사자의 적이라는 역할로부터 레오파르두스는 때때로 용의 사촌이나 동맹자가 되기도 했다."(65-6)


3 멧돼지 사냥


"교회와 성직자가 동물의 무리 안에서 멧돼지에게 할당한 위치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멧돼지의 상징성은 일찍부터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로마의 사냥꾼·켈트의 드루이드·게르만 전사들이 그토록 예찬하던 이 동물을 불순하고 끔찍한 것, 선의 적, 신에 맞서는 죄인의 이미지로 바꿔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의 포도밭을 황폐하게 만든 멧돼지를 묘사한 「시편」의 구절에 관한 주해서를 남겼고, 이것이 멧돼지를 악마의 피조물로 본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13세기가 되면 멧돼지는 추악하고, 거품을 뿜어대고, 악취를 풍기고,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등의 털은 곤두서고, 억센 털은 줄무늬를 이루고, 〈입 안에는 뿔을〉 지니고 있다. 모든 점에서 그 동물은 악마의 화신이었다." "중세 말에 일곱 가지 덕목과 대립하는 7대 죄악의 체계가 작동하자, 멧돼지는 그 죄악들 가운데 6개나 속성으로 지니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오만·색욕·분노·탐식·질투·태만의 죄악이었다. 오직 인색만이 멧돼지와 연결되지 않았다."(84-6)


"앙리 드 페리에르는 이 악마 같은 동물을 그리스도적인 동물과 대립시켰다. 사슴이었다. 사슴이 지닌 열 가지 특성은 멧돼지의 그것과 마주서서 짝을 이루고, 10개로 갈라진 뿔은 십계에 대응했다. 〈이 뿔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세 가지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고 준 율법의 십계를 나타낸다. 세 가지 적은 육신과 악마, 세속이다.〉" "교부들과 라틴 동물지는 (해마다 새로 자라나는 사슴의 뿔에 기초해서?) 사슴을 다산과 부활의 상징이자 세례의 이미지, '악'의 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목마른 사슴이 샘물을 찾듯이 의로운 사람의 영혼이 주를 찾는다는 「시편」의 구절에 끊임없이 해석을 덧붙였다. 교부와 신학자는 사슴을 순수하고 덕이 있는 동물, 선량한 기독교인의 이미지, 새끼 양과 유니콘과 같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나 대체물로 삼았다. 또한 (라틴어에서 '종'을 뜻하는) '세르부스servus'와 ('사슴'을 뜻하는) '케르부스cervus'의 유사성에 기초한 언어유희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슴은 '구세주servator'였던 것이다."(87-8)


4 나무의 힘


"중세문화에서 나무와 돌의 대립은 나무와 금속의 대립만큼 격렬하지는 않았다. 나무와 돌의 관계는 가치 있는 물질과 가치 있었던 물질 사이의 대립이었다. 그러나 나무와 금속의 관계는 순수한 물질과 악마적인 물질 사이의 대립이었다. 나무는 성스러운 십자가의 이상적인 이미지로 거룩해진 순수한 물질이었지만, 금속은 불안을 가져오고, 도리에 어긋나며, 거의 악마적이기도 한 물질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사람들의 감수성에서 금속은 (하찮은 것이든 귀한 것이든) 언제나 얼마간 지옥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지의 배에서 꺼내져 (나무의 커다란 적인) 불로 처리되었다. 곧 어둠과 지하세계의 산물이었고, 어느 정도는 마법과도 관련된 변질과 조작의 결과였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대장장이는 분명히 능력이 있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금속과 불을 다루는 일종의 마법사이기도 했다. 반대로 목수는 고귀하고 순수한 재료를 가공했기 때문에, 소박하지만 존경을 받는 장인이었다."(94)


"13세기가 지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될 변동의 징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기 1천년 이후 이루어진 개간과 기술의 진보, 상업의 확대로 유럽의 숲은 크게 파괴되었고, 상대적인 결핍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런데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중세 말에는 이러한 경제발전의 둔화와 몇몇 기술적 측면에서의 가치하락이 상징적 측면에서도 상대적인 하락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나무는 더는 유일한 최고의 재료가 아니게 되었으며, 직물이 점차 그 지위를 뚜렷하게 위협해왔다. 실제로 직물 산업은 12세기와 15세기 사이의 시기에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서양 경제의 진짜 원동력이 되었다." "옷은 그것을 입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어떤 지위나 계급에 있는지, 어떤 친족집단·직능단체·법적 집단에 속해 있는지를 나타냈다. 이렇게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적인 상징체계와, 그와 짝을 이루는 상상에서 직물은 다른 재료들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96-7)


5 왕의 꽃


"중세 초기에 백합꽃 문양은 줄곧 왕가의 표상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 그와 함께 주로 그리스도와 연관된 강한 종교적 차원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구약성서 「아가」에 나오는 〈나는 들판의 꽃, 골짜기의 백합〉(2:1)이라는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13세기까지 백합이나 백합꽃 문양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기 1천년 이후 성모 신앙이 확산되자,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 소재도 점차 마리아의 상징과 결합해갔다. 그 뒤 「아가」의 〈가시나무 사이의 백합처럼, 소녀들 사이에 있는 나의 연인〉(2:2)이라는 구절과도 연결되었고, 성서와 교부들의 주해서 안의 수많은 구절들에서도 백합은 순수함과 순결함의 상징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봉건시대 이후에 성모 마리아는 원죄에서 벗어나 잉태를 했다고 여겨졌다. 아직 이것은 '무염시태'의 교리로까지 틀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 교리는 19세기가 되어서야 결정적으로 인정되었다."(114)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 이후로 프랑스 국왕은 방패와 깃발, 의복에 백합꽃 문양을 붙일 때에 하나나 셋이 아니라 꽃을 흩뿌린 문양을 선택했는데, 꽃의 숫자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러한 특이성은 표장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이룬다. 먼저 똑같이 백합꽃 문양으로 장식된 다른 문장들로부터 왕의 문장을 구별한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표장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치는 여기에 강력한 상징적 차원의 의미도 더한다. 곧 뭔가가 총총하게 박힌 그 구조는 별들이 빛나는 하늘이자 우주의 이미지이다. 다시금 이 문장의 기원과, 하늘의 왕과 지상의 대리인인 프랑스 국왕의 특권적인 유대 관계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1300년대로 접어든 뒤에는 흩뿌려진 백합꽃 문양과, 대개의 경우 3개로 숫자가 줄어든 백합꽃 문양 사이에 꽤 뚜렷한 구별이 생겨났다. 흩뿌려진 백합꽃 문양은 국왕 자신이나 그의 가족에 소유되었으나, 3개의 백합꽃 문양은 위임된 왕권이나 정부, 나아가 행정권을 나타내기도 했다."(119-21)


2부 색과 표장


6 중세의 색


"중세의 색은 색 나름이었다. 대체로 거의 모든 것에 (왕실에서는 먹을거리나 개, 말, 독수리 같은 동물의 털이나 깃털 등에도) 색이 입혀졌지만, 모든 색이 똑같은 차원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뚜렷하고, 빛이 나며, 채도가 높고, 확실한 색들이 '완전한 색'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색들은 빛을 내뿜는 생명과 기쁨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색은 대상에 밀착해서 시간의 경과와 세계, 햇빛에도 바래지 않았는데,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만, 특정한 종류의 전례나 축제, 의식과 관련된 때에만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장소를 대표하는 것은 교회였다." "여기에 교회 의례에서 사용하는 물품이나 의복, 전례서, 다양한 축제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대부분 직물로 된) 장식과 같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색이 더해졌다. 13세기 이후에는 미사 자체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행사처럼 되었고, 전례의식에서 색이 맡는 역할은 더욱 커졌다."(145-6)


"문장은 12세기에 출현했지만, 1200~1220년대부터 실질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는 일찍부터 장인과 농민의 문장이 존재했듯이) 모든 사회계층과 범주로 확산되었고, 문장에 관한 규칙들도 고정되어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규칙 체계의 한가운데서 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이때 색은 (흰색·노란색·빨간색·파란색·검은색·녹색의) 여섯 가지로 제한되었다." "중세 말에 문장이 확산되면서 모든 공간과 모든 상황에서 이러한 색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문장은 마을에서도 일상적인 풍경의 일부를 이루었다. 모든 교구의 교회들이 13세기 중반 이후에는 사실상 문장의 '박물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본적인' 여섯 가지 색은 다른 것들보다 자주 나타난 특정한 배색을 눈에 익숙하게 만들고, 거꾸로 (빨간색과 검은색, 녹색과 파란색, 파란색과 검은색을 나란히 놓는 것처럼) 문장체계에서 금지하고 있는 배색을 꺼리거나 드물게 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146-7)


7 흑백 세계의 탄생


"중세 신학에서 빛은 감각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면서도 비물질적인 유일한 영역이었다. 빛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가시화된 것으로, 말 그대로 신적인 것의 발현이었다. 그래서 이런 물음들이 던져졌다. 색은 물질적인 것인가? 비물질적인 것인가? 이 문제는 가톨릭 교회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색이 빛의 한 부분이라면,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신적인 성질을 지니게 된다. 신은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상에서 색이 차지하는 공간을 넓히는 일은 어둠이 차지한 공간을 줄이는 것, 곧 신의 영역인 빛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색은 빛에 대한 추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다. 하지만 반대로 색이 물질적인 실체로 단순한 포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신성의 발현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천지창조의 위업에 인간이 쓸데없이 덧붙인 인위적인 것일 뿐이다. 색은 죄를 지닌 인간이 신과 화해하는 길로 '옮겨가는 것'을 방해하는 해로운 것이 된다."(154)


"클레르보의 수도원장 성 베르나르에게 색은 빛이기 이전에 물질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색조가 아니라, 오히려 밀도·농도·깊이가 문제였다. 색은 지나치게 풍부하고 불순한 것이었다. 곧 고위성직자들의 말에 흔히 등장하며 사실상 전부라고도 할 수 있던, 헛된 사치와 '허영vanitas'이었다. 아울러 색은 농밀한 것·불투명한 것과 관계가 깊었다." "그에게 '색'이라는 말은 좀처럼 '빛'이나 '광채'라는 관념과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혼탁한', '빽빽한', '꽉 막힌' 등이 어휘들로 꾸며지는데, 그 어휘들은 모두 혼란·포화·어둠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색에서 빛이 아니라 빛이 빛이 없음을, 밝음이 아니라 어둠을 보고 있었다. 색은 밝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둡게 한다. 그것은 어둠의 영역을 넓혀 숨통을 조여온다. 색은 악마적인 것이다. 아름다운 것·빛나는 것·신적인 것은 모두 다 어둠을 벗어나 그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색으로부터, 특히 다색多色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야 한다."(157)


# 그렇지만 중세 가톨릭 세계에서 성 베르나르의 태도, 더 일반적으로 (예배당 내부의 빛을 제한했던) 시토파의 태도는 소수였다.


"16세기 초는 인쇄본과 판화의 이미지, 곧 '흑백'의 문화와 상상이 지배적으로 되어가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때 태어난 프로테스탄트는 (예배·옷·예술·주거·'업무' 등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전면적으로 검은색·회색·흰색을 중심으로 구성된 색의 체계를 권장하고 확립했다." "츠빙글리에게 예배의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진지한 분위기를 흩트리는 것이었다. 루터와 멜란히톤에게 교회는 인간의 모든 허영을 없애는 장소여야 했다. 카를슈타트에게 교회는 〈유대교 회당처럼 순수해야〉 했다. 칼뱅에게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은 신의 말씀이었다. 곧 이들 모두에게 교회는 신자를 거룩함으로 이끌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간소하고 조화로우며 어지럽지 않은 곳, 겉모습의 순수함이 영혼의 순수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 교회가 연출하던 전례의 색은 머물 곳을 잃었고, 교회 내부에서 색은 어떤 전례적 역할도 맡지 않게 되었다."(181, 186)


"성 베르나르와 칼뱅의 말은 비슷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예술에서 나타난 색 혐오는 전혀 혁신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동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서양의 색에 관한 감수성의 변화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맡았다. 흑백의 세계와 본연의 색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데 기여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색 애호라는 로마의 반작용을 낳아 바로크와 예수회 예술의 탄생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실제로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은 교회를 지상에 실현된 천상의 이미지이자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보는 교리를 바탕으로 성전 내부의 온갖 화려함을 정당화했다. 신의 거처에 지나친 아름다움 따위는 없었다. 종교개혁은 대리석·금·값비싼 직물과 보석·스테인드글라스·조각상·프레스코화·종교화·반짝이는 도장과 채색과 같은 모든 것들을 교회와 예배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바로크 예술과 함께 교회는 다시 색의 전당이 되었다. 로마네스크 시대에 클뤼니파의 전례와 미학이 그랬듯이 말이다."(190-1)


8 중세의 염색업자


"'혼합'에 대한 혐오의 영향은 일상생활이나 물질문화에서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상징의 영역에서도 매우 많이 나타났다. 덧붙이고, 헝클고, 융합하고, 뒤섞는 것은 흔히 악마와 같은 일로 여겨졌다. 창조주가 부여한 사물의 본성과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염색업자·대장장이·약제사·연금술사처럼) 그런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의심을 받았다. 그들은 물질에 일종의 속임수를 쓰는 것처럼 여겨졌고, 그들 자신도 어떤 작업을 하는 것에는 망설임을 품고 있었다. 예컨대 염색업자의 경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색을 섞어서 제3의 색을 만들려고 선뜻 달려들지 않았다. 가령, 녹색 색상은 파란색과 노란색을 섞어서 얻지 않고, 자연물의 녹색 색소와 염료에서 얻거나, 파란색이나 회색 염료를 혼합하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 처리해서 얻었다." "파란색과 빨간색을 섞어서, 다시 말해 대청과 꼭두서니 염료를 혼합해서 보라색을 얻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201-2)


"염색의 가격이나 가치 체계는 적어도 색 만큼이나 농도·선명도에도 기초해 있었다. 곧 아름다운 색, 귀하고 값진 색은 진하고 선명하고 빛나는 색이었으며, 직물의 섬유에 깊게 배어들어 햇빛·세탁·세월에서 오는 탈색을 견디는 색이었다." "이는 우리의 지각이나 근대적인 관념과 충돌한다. 중세의 염색업자와 그들의 고객에게 진한 색은 똑같은 색상의 흐리고 덜 짙은 색보다 다른 색상의 진한 색과 더 가깝게 지각되었다. 예컨대 모직물의 진하고 밝은 파란색과 더 가까운 것은 흐리고 광택이 없는, '색바랜' 파란색이 아니라, 똑같이 진하고 밝은 빨간색이었다. 이러한 진한 색, 짙은 색, (또렷하고 내구성이 강한) 바래지 않는 색에 대한 추구는 염색업자를 위해 마련된 모든 처방집들에도 나타난다. 이 경우에도 핵심적인 조작은 매염이었다. 직물과 염료들마다 서로 다른 착색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작업장마다 고유한 관습과 처방이 있었는데, 기술은 펜과 양피지보다는 입과 귀를 거쳐 더 많이 전해졌다."(204)


9 붉은 털의 남자


"모든 배신자들처럼 유다도 붉은 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중세 전통에서 붉은 머리카락이나 수염으로 관습적으로 구별되던 카인, 델릴라, 사울, 가늘롱, 모드레드와 같은 이들 말이다. 실제로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배신은 자신의 색들을,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신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빨간색과 노란색 사이에 위치한 그 색은 두 색 모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 두 색을 합쳐 부정적인 상징성을 단순히 두 배가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이 악한 빨간색과 악한 노란색의 혼합은 우리에게 친숙한 오렌지색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오렌지색은 중세의 감수성에서는 그 색조와 빛깔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렌지색보다 어둡고 채도가 높은 이 색은 악마·여우·위선·거짓·배신의 색인 적갈색이었다. 중세의 적갈색은 언제나 빨간색이 노란색보다 짙었고, 이 빨간색은 진빨강처럼 빛나지 않았다. 그래서 윤기가 없는 침울한 색조를 띠어, 빛 없이 타오르는 지옥의 불꽃을 연상시켰다."(225-6)


# 사라센과 결탁해 롤랑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늘롱, 아서왕을 배신한 모드레드


"그러나 유다가 빨갛지만은 않았다. 그는 노랗기도 했다. 12세기 말 이후의 도상들에서는 노란색이 점차 유다의 옷에 자주 할당되는 색으로 등장했다. 그의 '붉은 털'에는 (악한 피와 악한 불을 뜻하는) 피와 지옥의 빨간색만이 아니라, 배신과 거짓말의 노란색도 동시에 담겨 있었다." "수많은 문학·백과전서 문헌들에서 그 색은 일찍부터 거짓과 거짓말의 색이었다. 나아가 점차 유대인의 색이자 유대교 회당의 색이 되었다. 1220~1250년대 이후 기독교 도상은 유대인을 나타내는 데 이 색을 거듭 사용했다. 이제 유대인은 노란색 옷을 입거나, 일부가 노란색으로 된 복장으로 표현되었다. 모자가 가장 많았고, 긴 겉옷·망토·허리띠·소매·장갑·신발이 노란색인 경우도 있었다. 이런 관습은 점차 도상과 상상에서 현실로 옮겨갔다. 랑그도크·카스티야·이탈리아 북부·라인강 유역 등의 지방에 있는 여러 도시들에서 유대인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복장 규제를 강제하면서 식별의 기호로 이 색을 즐겨 사용했다."(234-5)


10 문장의 탄생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중반 사이) 서양의 전사들은 (턱까지 치켜 입는) 사슬갑옷의 두건과 (얼굴을 덮어 가리는) 투구의 콧대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투가 한창일 때 적군과 아군을 식별할 수 있는 기호로 1080~1120년 무렵부터 (이 부사가 중요한데) '점차' 방패의 넓은 평면에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동물·꽃 등을 그려넣는 관습이 생겨났다." "원시적인 문장체계는 개인·가문·봉건적 관계라는, 기존의 3중의 표장체계를 (사회적·기술적으로) 단일한 체계로 결합시킨 산물로 등장했다. 새로 탄생된 체계는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에 교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문장을 기술하는 데 쓰인 언어가 처음부터 (라틴어가 아니라) 속어였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그 체계는 군사적 차원을 뛰어넘어, 12세기를 거치면서 모든 개인과 사회집단들에 더 큰 파급력을 끼치면 제기된 문제, 곧 정체성의 탐구와 확립이라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다."(243, 248-9)


"1180~1200년대 이후 하나의 혈족 안에서는 단지 한 인물, 곧 본가의 장자만이 '완전한' 문장, 요컨대 덧붙여진 요소가 없는 가문의 문장을 지녔다. 다른 자식들과 그 밖의 다른 모든 이들은 그와 같은 권리를 지니지 못했다. 그들은 문장에 변형을 더해서 자신이 '문장의 우두머리'가 아님을, 곧 본가의 장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야 했다. 이러한 변형을 '분가 표지Brisure'라고 한다. 여성에게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았다. 미혼인 여성은 아버지와 같은 문장을 지녔고, 기혼인 여성은 대체로 남편의 문장과 아버지의 문장을 조합한 문장을 사용했다." "문장은 세습되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친족관계에 있는 것 같지 않은 두 가문이 몹시 비슷한 형태의 문장 때문에 같은 조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문장체계는 계보학을 도와서 인물을 식별하거나, 인명을 재발견하거나, 혈통을 확인하거나, 친족관계를 재구성하거나, 동명이인을 구별하는 데 기여했다."(259-60)


"방패는 문장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고, 그것이야말로 '엄격한 의미에서stricto sensu' 문장을 나타낸다." "방패 바깥의 장식들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중요한 것은 투구꼭대기장식cimier, 곧 투구와 헬멧 위에 표현된 문양이었다. 이것은 개인의 욕구만이 아니라, '씨족' 형태의 친족관계도 나타냈다." "투구꼭대기장식은 적어도 처음에는 (방패 문장과 달리) 인물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격을 변화시켜 그 인물에 새로운 힘을 부여했으며, 그를 좁은 가문의 틀에서 끌어내서 더 넓은 친족관계의 연결망 안에 자리하게 했다. 곧 그것은 일종의 가면이자 토템이었다." "이러한 '씨족적인' 투구꼭대기장식에 가장 집착한 것은 당연히 적장자의 가문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다시 말해 가장 낮은 지위의 분가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귀족 가계에서 가문의 투구꼭대기장식에 가장 집착하고, 개인의 투구꼭대기장식을 가장 사용하지 않은 것은 대부분 지위가 낮은 자들이었다."(268-9, 275)


11 문장에서 깃발로


"(프랑스·영국의 경우처럼) 국가의 탄생이 국민의 탄생보다 앞선 곳도 있고, (스위스·독일·이탈리아의 경우처럼) 순서가 반대인 곳도 있다. 국가가 국민에 앞서 탄생한 경우에 (갈리아의 수탉·아일랜드의 클로버·바스크의 십자가 등과 같은) 오랜 민족적 상징은 결코 공식적인 국가의 형상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 대신 옛 왕조의 표장이 군주제의 표장을 거쳐서 국민적 상징의 역할을 맡았다. 국민이 국가에 앞서 탄생한 나라들에서는 오래된 문장의 형식이나 색이 왕조와 결합했다. 아울러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연방 조직자의 역할을 맡으면서 곧 국민적 상징이 되었다." "바이에른의 사례를 보면, 1918년 이후 바이에른 왕국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비텔스바흐 왕조의 혈통도 뿔뿔이 흩어지고 갈라져서 더는 바이에른을 통치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바이에른 주와 주민은 그대로이다. 아울러 오래된 '은색과 청색의 빗금무늬 방추형 문양'은 그들에게 여전히 연방 결성의 표장이자 주권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285-7)


"모든 기호, 표장, 색과 마찬가지로 깃발도 결코 홀로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깃발들과의 관계와 비교를 통해서만 비로소 생명을 지니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리스 국기는 1821~1823년 오스만튀르크에 맞서 국민적 반란이 일어났을 때 처음 등장했으며, 혁명기를 거쳐 독립을 달성한 1833년에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처음의 구성은 '청색 바탕에 은색 십자가'였으나, 뒷날 두 차례에 걸쳐 바뀌어 오늘날의 '파란색 바탕에 1개의 흰색 십자가와 4개의 가로띠무늬' 형태가 되었다." "그리스 깃발의 최초 구성은 (빨간색 바탕에 흰색 초승달과 별 모양인) 오스만튀르크 깃발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이슬람의 초승달에 대응하고, 오스만튀르크와 이슬람 세계에서는 낮게 평가되던 파란색은 빨간색에 대응한다. 이렇게 소수자의 깃발은 홀로는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다른 어떤 것에 맞서는 대립물로 기능하면서 저항을 공공연히 선언하는 역동적인 상징이 된다."(296-8)


3부 놀이와 영향


12 체스의 전래


"인도에서 오래전에 출현한 체스의 다른 형태에서는 대체로 (움직이는 말을 선택하는 것이나 판 위에서 나아가는 칸수와 같은) 체스말의 진행방법을 주사위로 결정했다. 이런 방법은 놀이가 이슬람 세계로 확산되었을 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서양에 전해졌을 때에는 부활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었다. 교회에게 라틴어로 '알레아alea'라고 하는 '운에 맡기는 놀이'는 꺼려야 할 것이었고, 뜻밖의 행운에 의지하는 노름은 모두 악마적인 것이었다. 주사위는 특히 나쁜 것이었다. 다른 놀이보다 내기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오두막집·술집·수도원 등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든 돈·옷·말·집 등을 가지고 있는 온갖 것들을 걸고 내기를 했다. 주사위는 위험한 놀이이기도 했다. 주사위통이 사용되기는 했으나, 문학작품에도 가끔 언급되듯이 특수하게 조작한 주사위를 이용한 속임수가 자주 행해졌기 때문이다. 요컨대 체스를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주사위였다."(314-5)


"그러나 중세에 교회와 수도원의 수장고에 체스말이 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교회의 태도는 놀랍다. 한쪽에서는 체스를 즐기는 관습을 단죄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거의 성유물을 숭배하듯이 체스말을 대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체스라는 놀이는 악마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것에 사용되는 체스말은 중요하게 보관되거나 때로는 숭배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단죄가 그다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놀이를 즐기는 관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꾸준히 사회 전체로 퍼져갔다. 둘째로, 13세기에 이르러 놀이 자체가 일반적으로 재평가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그 뒤 놀이들은 대대적으로 궁정풍 기사도 교육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다. 끝으로, 무엇보다도 체스에 대해 교회가 적의를 품은 중요한 이유이던 주사위의 사용, 곧 우연에 의지하는 성격이 점차 사라졌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 "주사위 사용을 포기하면서 체스는 점차 명예로운 지위를 확보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숙고가 우연을 대신했다."(313-5)


13 아서왕 놀이


"13세기 중반 아서왕 전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수많은 지역들에서, 그리고 귀족층뿐만 아니라 농민층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중세말(14~15세기)에 아서왕과 관련된 인명을 (일시적인 별명을 제외하고) 실제의 세례명으로 하는 관습은 가장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두 사회계층과 관련이 있었다. 하나는 얼마간 몰락해가던 소귀족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지위가 높아지던 부유한 도시상인 계층이었다. 소귀족에게 그러한 관습은 백년전쟁에서 크게 훼손된 기사로서의 위신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울러 인명이라는 '겉모습'으로 경제적·정치적 쇠퇴를 메우려는 수단이기도 했다. 거꾸로 부르주아에게는, 아니면 적어도 도시 귀족에게는 (정략결혼, 자금 대부, 왕에게의 봉사 등 귀족사회로 참여하기 위해 행한 다른 거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가치체계에 기초해 귀족문화와 귀족계급으로 들어가기 위한 사회적 전략이었다."(343, 347-8)


14 라퐁텐의 동물지


"라퐁텐이 그려낸 동물들은, 그가 말하는 것처럼 시골의 한가한 무료함 속에서 만난 동물들이 결코 아니었다. 대다수가 이미 고대와 중세의 우화작가들이나 동방의 이야기 작가들, 『여우이야기』나 이솝우화, 동물을 소재로 한 시의 세계와 같은 온갖 전통들에 등장했던 동물들이었다." "동물의 왕인 사자는 오만하고 위엄이 있었고, 여우는 교활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늑대는 언제나 굶주려 있고 잔혹했으며, 당나귀는 어리석고 게을렀다. 토끼는 유쾌하고 느긋했으며, 까마귀는 시끄럽고 욕심이 많았다. 동물들은 모든 우화에서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지식인 계층의 문화와 민중문화에서 이러한 동물의 성질은 점차 틀에 박힌 형태로 굳어졌다. 그리고 뛰어난 동물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장학은 언제나 형태보다 구조를 우선하며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진 불변의 뼈대 주위에 일종의 유연성을 만들어냈다. 동물들이 그 뒤 어떻게 쓰이든 결코 자신의 성질을 잃지 않을 그런 유연성이었다."(355-6)


15 애수의 검은 태양


16 아이반호의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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