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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님의 서재
  • 전쟁과 죄책
  • 노다 마사아키
  • 17,820원 (10%990)
  • 2023-08-05
  • : 4,579

# 본 책은 2000년에 출간된 『전쟁과 인간』의 재판(再版)으로, 새롭게 보강된 내용은 없다.


서장 죄의식을 억압해온 문화


"패전 직후의 쇼크, 감정 마비와 혼란이 가라앉은 뒤, 일본인의 반응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반응은 '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 가담자와 피해자를 뭉뚱그려 아무도 벌하지 않는다. 〈이겨도 져도 어차피 전쟁은 비참한 것〉이라는 입장에서 평화를 제창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것은 평화운동으로 나타났다. 평화운동에도 두 가지 흐름이 있다. '아무도 벌하지 않는다'는 절대 평화를 주장하는 무리와, 스스로를 벌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반전 세력(사회주의권)과 호전 세력(미국)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무리가 있었다." "두 번째 반응은 '물질주의로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전쟁에 의한 마음의 상처를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덮어씌우고, 물량에서 미국에 진 것이니까 경제를 부흥하고 공업을 재건해서 미국의 경제력을 따라잡는 것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세였다. 거기에는 정신적 퇴폐와 중국 문명에 대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이 숨어 있었다."(20-1)


제1장 의사와 전쟁


"나는 지금까지 전범으로 중국의 수용소에 잡혀 들어갔었던 일본군 출신들을 많이 만나왔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나는 중국인을 학살했다. 그러므로 사정이 어찌 됐건 그들도 나를 죽일지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아사는 생체 해부를 했으니까 (죄인지 아닌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자신도 생체 해부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싹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마음속에서 변명하고 있는 거죠. '명령이었다, 어쩔 도리 없었다, 전쟁이었다, 이런 일은 흔했다, 여기저기서 범상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고. 이제 전쟁은 끝났고요.〉 여기에는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집단에 준거해서 사는 인간의 정신세계가 잘 나타난다. 자아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집단으로 있는 한 불안하지 않다. 집단이 혼란에 빠질 때는 자신도 혼란에 빠지지만, 그때뿐이다. 집단은 끊임없이 개개인이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호하게 흐리고, 집단이 요구하는 모든 행위에 동의하도록 한다."(50-1)


제2장 길 아닌 길


"신학교 교수 구마노 요시타카가 저술한 『종말론과 역사철학』(1933년 9월)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교회는 자신이 속한 국가에 대해 충성과 근로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는 변증법적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자연법을 넘어 성스러운 의지로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이 의지의 대변자로서 각각의 민족과 그 문화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전쟁 시기와 패전 이후까지 일본의 지식인들이 품고 있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국가권력이 국민정신의 총동원을 목표로 검열을 강화할 때, 천황제 국가의 악에 대해 의연하게 반대할까, 아니면 침묵할까, 그것도 아니면 검열을 비껴갈 듯 말 듯한 발언을 해서 결국에는 탄압당할까, 셋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은 변증법이라는 주문에 의지해 명확한 대립을 모호하게 피하며, 자신들의 이론이 '높은 차원에 서서 파악하는 것'이라거나, '단번에 파악하는 것'이라고 떠들어댔다."(89-91)


제3장 마음이 병드는 장병들


"1940년 8월부터 12월에 걸친 팔로군의 대공격으로 타격을 입은 일본 북지나군은 중국공산당의 해방구를 없애기 위해, 훗날 중국이 이른바 '3광 작전(살광[殺光, 남김없이 죽인다], 소광[燒光, 남김없이 태운다], 창광[창光, 남김없이 빼앗는다])'이라 부른 작전을 실행했다. 일본군 병사들은 자신의 인격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비윤리적 행위를 작전으로 명령받았고, 신체를 극한까지 흥분시키면서 이를 실행에 옮겨야 했다. 견딜 수 없어 도망치면 적 앞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사살당했고, 일본에 있는 이들의 부모형제는 '비국민'의 가족이라며 손가락질당했다. 억지로 몸을 추스르더라도, 어느 순간 거부반응이 시작된다." "오가와는 '전쟁신경증'이란 개념조차 몰랐지만, 다수의 심인성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히스테리성 경련 발작, 보행 장애, 반신불수, 실어증, 자해. 이 모두는 심인성 증상이었으며, 신체의 병변은 없었다. 밤중에 가위눌려 갑자기 일어나 소리 지르는 야경증 환자도 적지 않았다."(110-2)


"오가와는 강한 척하는 인간의 어쩔 도리 없는 나약함을 줄곧 보아왔다. 만주사변 직후 펑톈에서 경비를 서던 학생들의 공포심과 그것을 견디다 못한 살인.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의 초년병 교육 시절, 인격이 퇴행하여 죽음에 빨려들어 가던 병사들의 모습. 스자좡병원과 베이징 제1육군병원에서 전쟁 영양실조증으로 왜소하게 오그라들어 죽어가던 병사들. 혹은 자살하는 병사. 그들은 약탈 전쟁에 적응할 수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도망죄로 총살당하기 직전의 병사들. 기나긴 비인간적인 시간 속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격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이한다." "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세대는 가미가제특공대를 통해, 그 '영웅적인 죽음'만을 보고 전쟁을 관념적으로 파악한다. 건강한 남성의 죽음은 관념적으로 미화되기 쉽다. 전쟁터의 최전선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관념에 의한 미화에 집착한다. 그러나 오가와는 현실의 시간은 길고 거기서 인간은 철저하게 몸과 마음이 짓이겨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125-6)


제4장 전범 처리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된 초기에는 고지마도 집단의 힘을 믿고 간수를 향해 고함치고, '동기(同期)의 벚꽃' 같은 전쟁 전의 유행가를 부르며 지냈다." "고지마는 이른바 '완고(頑固) 분자'였다. 딱딱한 변명의 갑옷을 두르고 웅크리고 있는 수인들에게 중국 쪽이 취한 방침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본군이 저지른 일들을 알려주는 것, 군대 하나하나는 자신이 관여한 전쟁터밖에 모른다. 게다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지금 당장 직시하는 일은 괴롭다. 그래서 관리소 측은 중국 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지금도 전쟁 피해가 얼마만큼 지속되고 있는지 등의 외부의 사실을 알리는 방법을 취했다. 다른 하나는 충분한 보살핌이었다. 둘다 푸순전범관리소에 배속된 혁명군 병사들이 해방군이 되어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인간관계였다. 거기에 하나 더, 이 두 가지 방침을 지탱해준 것은 '시간'이었다. 천천히 시간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렇게 기다려줌으로써 전범들의 태도 변화에 대비하고자 했다."(149-51)


제5장 탄바이, 죄를 인정하다


"죄를 고백한 뒤, 고지마와 다른 전범들은 빨리 각자에게 걸맞은 형을 선고받고 용서받기를 바랐다. 마음은 온통 일본으로 돌아갈 날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다." "1956년 6월 21일, 기소 면제 결정을 듣는 순간, 그저 '돌아갈 수 있다'는 환희가 가득 차 올랐다. 지금까지의 죄의 자각도, 어떤 형벌이든 달게 받겠다던 반성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톈진을 향해 떠나는 기차 안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톈진에 도착한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일주일 정도 있었는데 여전히 밤이면 잠들지 못했죠. 일본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해서요. 그 정도로 내 마음은 온통 일본에 돌아간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감쪽같이 속였다' 하는 기분이었어요. 평생 죄를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는 둥, 그럴듯한 소릴 해댔지만, 귀국했을 때의 내 모습은 중국 쪽이 말하는 제국주의 사상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요?〉" "고지마가 개인으로서 전쟁범죄와 맞서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173-8)


제6장 슬퍼하는 마음


"고지마는 구체적인 사실을 중시하는 남성이다. 감정을 억제하고 공상을 배제한다. 그것은 근대 일본의 교육이 추구한 바이다. 또한, 시대가 전쟁을 수행할 실무자를 요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일본 남성에게 기대됐던 성격 특성은, 푸순전범관리소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오호연 지도원은, '제국주의 사상'이라는 말로 고지마가 감정 표현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감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지만, 죄의식에 생명을 주는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푸순에서의 체험이 없었더라면, 슬픔을 느낄 힘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슬픈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야말로 고지마를 감정을 지닌 인간으로 존재하게 해준다. 그는 푸순전범관리소에서 6년의 준비기간을 거쳤고, 자신이 죽인 아이의 얼굴을 고스란히 떠올리는 체험을 했다. 이때, 고지마가 죽인 사람들은 비로소 얼굴과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지마가 인간다운 감정을 되찾는 일이기도 했다."(188-9, 198-8)


제7장 과잉 적응


"도미나가의 고백에는 일본 군대 시스템이 어떻게 단순한 청년을 살인 수행의 부품으로 변화시켰는지에 관한 중요한 관점이 제시된다. '전쟁은 인간을 잔혹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반화는 사고의 태만에서 비롯된다. 구체적인 전쟁이 있고, 각각의 군대가 있으며, 그런 구체적인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잔혹해진다. 도미나가는 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징병되자, 다른 고학력자들처럼 당연히 견습 사관을 지원했다. 그리고 야전 소대장(소위)이 되었다. 〈내 부하인 부사관, 병사들은 모두 역전의 용사들이다. 나만 전투 경험이 없다. 이런 부하를 지휘하려면, 포로 한 명도 못 벤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소대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나는 '인간이기'보다는 '야전 소대장이기'를 선택했다.〉 소속 집단에 적응하고자 하는 노력, 그리하여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마음, 즉 일본형 상승의식이 그를 잔혹성을 느끼지 못하는 살인 기계로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잔혹행위를 거부할 수 있을까?"(220-1)


제8장 복종으로의 도피


"칼 야스퍼스는 『죄책론』(1946)에서 죄의 개념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 "형법상의 죄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규정이 결론지은 '평화에 대한 범죄' '전쟁범죄' '인도에 대한 범죄' 등을 범한 행위에 대한 책임이다. 정치상의 죄란, 국민은 그가 속한 국가가 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정치에 무관심했던 점, 정치 권력을 나치에게 넘겨준 점도 정치상의 죄다. 도덕상의 죄는, '명령에 따랐다'고는 하지만 나치 정권을 지지하고, 거기에 관여했다면 죄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도덕상의 죄의 심판자는 자기 양심이며, 타자는 그 사람과의 정신적 교류를 통해 책임을 물을 뿐이다. 형이상의 죄에서는, 범죄가 저질러질 때 그것을 지지하거나 관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신 앞에서 죄가 추궁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도덕상의 죄와 형이상의 죄는, 오직 개인만이 이것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의 죄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 죄는 끝나는 일이 없다'고 글을 맺었다."(240-1)


제9장 죄의식 없는 악인


"나가토미 히로미치는 지독한 악행을 저질렀다. 고쿠도칸전문학교 학생 시절, 우익 학생운동 활동으로 난징 학살에 가담했고, 이후 스스로 원해서 상하이 특무기관에 들어가, 1941년부터 북지나에 파견되어 제37사단 중기관총중대 병사로서 산시성에서 온갖 난폭한 짓을 저질렀다. 그 잔혹함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부하였던 중국인으로부터 '염라대왕'이라 불렸다. 패전으로 현지 제대한 후에도 잔류 일본군을 조직하여 국민당계의 군벌 옌시산과 협력해 인민해방군과 싸웠다. 그가 해방군에게 체포당한 것은 1949년 4월이었다. 스무 살에 중국에 건너간 지 12년이 흘러 있었다." "1949년 4월 24일, 타이위안은 함락되고, 나가토미는 포로가 되었다. 그를 포함한 포로들은 성내 병사에 수용됐다. 야식 때가 되면, 해방군 병사들은 각자 휴대한 쌀을 꺼내어 포로들을 위해 밥을 지어주고, 자신들은 조밥을 먹었다. 포로는 병사에서 자고, 해방군은 야외에서 잤다. 나가토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259, 271)


제10장 세뇌


"나가토미가 귀국한 1960년대 일본 사회에는 그가 저지른 일들의 의미를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점에서 상처를 입었으며, 상처 입지 않은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 "이는 전쟁 시기에 나가토미가 한 행위와 근본적으로 통한다. 개인으로 돌아와 사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인으로서 책임을 자각하는 일은 결코 없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억압과 따돌림, 그는 그런 억압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나가토미는 아직 마음에 상처 입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자라난 자신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후반생을 반전운동에 바치며 살았다. 나가토미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전쟁이 직접 관여한 자를 모두 푸순전범관리소에 넣는 것 이외에는, 표면적이라도 일본인들을 바꿀 길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들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사회가 변화할 때마다 세뇌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의해 일본 전후 사회가 형성되어 갔다."(288, 296)


제11장 '시켜서 한 전쟁'에서 '스스로 한 전쟁'으로


"1989년 3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의 '치안 제21국'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그곳은 폴포트 일파에 의해 약 2만 명의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처형으로 내몰린 시설이다. 이전에 리세(고등학교)였던 교실에는 철골만 남은 침대, 철 족쇄, 전기충격 장치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핏자국이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벽에 걸린 칠판에는 고문받을 때의 요령이 백묵으로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묻는 말에 답하라. 일부러 멍청한 척 굴지 말아라. 그것은 혁명을 모독하는 짓이다. 너에게는 자신의 실책에 대해 말하는 것도, 혁명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채찍질, 전기충격에 소리 지르지 말아라. 캄보디아 크롬을 사용하지 말아라. 위반하는 자는 열 번 채찍으로 맞거나 다섯 번 전기충격······〉" "관동군 참모본부의 「포로심문요령」에는 이와 똑같은 사고방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것은 다른 문화에도 전파되는 것일까? 아니면 유사한 상황에서 인간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아마 그 둘 다일 것이다."(312-3)


# 캄보디아 크롬 : 남베트남 남델타에 사는 크메르인의 말


제12장 공명심


"쓰치야 요시오는 생물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소질을 타고났다. 사고력, 주의력, 기억력이 모두 뛰어나고, 건강할뿐더러 강인했다. 그는 성실하고 마음이 따뜻한 부모 밑에서 착실하고 의심할 줄 모르는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가난했다. 그는 전쟁 시기에 일본 국가가 요구하던, 건장하고 인고를 견딜 줄 아는 병사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이상적인 남자였다.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소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성실한 성품이라 소학교의 선생님을 존경했고, 선생님은 천황제 군국주의와 만주 개척의 야심을 그에게 주입했다." "그는 타고난 소질에 힘입어 군국주의에 과잉 적응하고 가난을 극복했지만, 그 종착역은 인간성의 상실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지니지 못한 지성은 비판 정신, 사물을 상대화해서 보는 힘이었다. 그것은 일본 교육이 가장 싫어하는 성격의 지성이었다. 쓰치야는 공명심에 불타올라 수많은 중국인을 체포·고문하면서 '특고(특별고등경찰의 준말)의 신'이라 불릴 정도가 됐다."(324-5)


제13장 탈 세뇌


"학습에 이어,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열거했다고 해도, 그것은 기억의 단순한 재생에 불과하다. 사건으로 정리하고 지적으로 반성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감정을 되돌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때의 행위는 당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끔 방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정이 통하는 인간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무감각한 채로 체험해 왔던 행위를 돌아보고, 추상 속에서 다시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도입부에서 류 반장과 같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을 향한 신뢰를 쌓고, 그와의 교류를 통해 군국주의 청년이 되기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회로를 통해, 쓰치야에게는 고통받아온 중국인에게 공감하고, 그렇게까지 잔학했던 자신을 자각하고, 무감각해져 있던 자신을 느낄 능력이 생겼다. 범죄를 저질러놓고도 상처 입지 않는 자는, 느끼고 생각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는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찢어진 틈새로 감정을 토해내고, 마침내 이데올로기의 갑옷을 부쉈다."(361-2)


제14장 양식(良識)


"일본군이 네그로스섬의 미군을 항복시키고 상륙한 것은 1942년 5월 22일. 원주민은 일본군을 해방군이라 여긴 듯, 2개월간 전혀 저항이 없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각지에서 수탈을 계속한 결과, 섬 전체에서 게릴라전이 확산됐다. 일본군은 의심스러운 남자들을 잡아와서 폭행과 물고문을 한 후 마지막에는 구덩이를 파서 찔러 죽였다. 중국을 점령하고 저질렀던 만행이 그대로 필리핀으로 옮겨졌다." "일본인은 이 전쟁에서 두 곳에 전선을 펼치고 있었다. 하나는 군비에 기초한 합리적 사고와 죽기를 각오하면 어떠한 일도 가능하다고 선동하는 비합리적 정신주의가 대치하는 전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중에게 받아들여지고 민중의 지지를 받아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민중을 지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결국에는 적으로 바꿔버리고 있는가 하는 사회관의 전선이었다. 오노시타 다이조는 전자의 전선에 대해서는 그다지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후자의 전선에서 일본의 패배를 확실하게 내다보고 있었다."(378-9)


제15장 아버지의 전쟁


"전후세대가 부모나 친척의 입을 통해 들은 전쟁은, 전사 통지, 공습의 공포, 소개(疏開), 전쟁 때와 이후의 식량난 등이었다. 부모 세대는 이런 기억을 즐겨 얘기했다. 그것은 난관을 극복해온 자기 긍정의 감정과 함께 전해졌다. 그러나 부모들은 결코 그들이 저지른 침략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자라난 전후세대는 핵전쟁 반대를 외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당신들은 과거에 무엇을 했는가?〉라는 비판을 들으면 할 말을 잃는다. 반론이나 변명으로 할 수 있는 말은 몇 가지 있다. 〈책임은 행위지가 지는 것이다,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나 개인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하는, 어쩌면 옳아 보이는 전제를 깔고 논리를 비약한다." "그러나 그렇게 반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 알고 있다. 지금 우리가 생활하는 일본 사회를 자신의 역사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전후세대가 개인으로서 져야 할 전쟁 책임은 물론 없지만, 침략전쟁에 빠져든 사회나 문화, 그리고 국가의 책임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394-5)


제16장 계승되는 감정의 왜곡


"아버지 세대가 숨겨왔고 때로는 폭력으로 왜곡시켜온 침략전쟁의 사실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음침한 일이다. 그 음침함은 아버지 세대가 보여준 잔학성이 아니라, 그 잔학성을 부인하려 했던 아버지 세대의 자세에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이 음침함을 청명하게 벗겨내지 않는 한, 감정의 풍요로움은 되찾을 수 없다. 감정의 풍요로움이 없는 한,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능력은 생기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강제로 연행하여 학대하고 죽인데 대해서도, '듣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상하느냐 마느냐, 보상액을 얼마로 하느냐만이 문제가 된다. 피해자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묻고 공감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상처 입은 사람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 자신의 무력한 체험을 정리하고 존엄을 되찾을 수 있다. 그것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보상금이 화제가 된다면, 피해자는 더욱 모욕당했다고 생각하게 된다."(440-1)


제17장 감정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풍부한 감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상처 입을 줄 아는 정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 부드러운 감정은 단번에 회복되지 않는다. 나는 우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책에서 각 장에 소개한 사람들이 했듯이,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자 하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된다. 전후 반세기가 지나 늦은 감도 있지만, 지금이라도 전쟁 시기를 산 사람들은 동시대인이 무엇을 했는지, 전후세대는 부모나 조부모가 무엇을 했는지, 물어봐야 한다. 물어봐서 알아갈 때 우리는 다음 단계에 도달한다.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알아야만 죽어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생생하게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에 의해, 고지마가 10여 년이란 세월이 걸려서야 자신의 정신적 외상을 느낀 것처럼, 굳어 있는 정신에 균열을 만들 수 있다." "알고 서로 이야기하는, 그리고 느끼는, 이 두 단계를 차례로 거쳐서, 우리는 상처 입을 줄 아는 부드러운 정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4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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