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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님의 서재
  • 핵의 변곡점
  • 시그프리드 헤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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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27
  • : 1,609

1장 시작하며


"평양은 지난 30년에 걸쳐 번갈아가며 (군사와 외교 전선 가운데) 어느 한쪽 노선을 다른 노선보다 우선해왔지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느 하나에만 매진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초점은 오로지 (북한의) 비핵화에 맞춰져 있었다. 처음부터 평양에게 외교냐 핵개발이냐 양자택일을 강요하며 정치적 중간지대를 없애버렸다. 평양의 이중경로 전략에 대처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외교를 위한 결정적 기회들을 놓치고 북한의 행동들을 일부 잘못 해석함으로써 결국은 나쁜 결정을 내렸다. 내가 언급한 변곡점이란 이런 순간들을 말한다." "북한은 종종 두개의 평행전선, 즉 핵무력을 구축하거나 핵·미사일 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기술/군사적 전선과 미국과의 전략적 협상을 모색하는 협상/외교적 전선을 따라 움직였다. 워싱턴은 북한이 이런 평행 전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심증을 가졌을 때조차 평양을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했다."(30-1)


2장 핵에 대한 기초 정보


# 핵무력을 위한 기술적 필수 조건

1. 폭탄 연료 : 우라늄235와 플루토늄239 농축

2. 무기화 : 핵무기 설계, 제조, 실험 과정

3. 운반 수단 : 핵폭탄을 운반 수단(발사체)에 결합


"1992년이 되자 북한 체제를 떠받치고 있던 소련의 안보 지원과 재정 원조가 완전히 붕괴했다. 소련이 붕괴하자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이 소련에 맞서 억지책의 일환으로 배치했던 핵무기를 감축하는 일방적 조치를 취했다. 그 목적은 흔들리는 자국의 붕괴를 막고 자국 핵무기를 안전하게 유지하려 고군분투하는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것이었다. 부시는 전세계 육상·해상 기지에 배치된 전술핵무기들을 모두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워싱턴은 그동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정책을 고수해왔으므로 이제 와 남한에서 핵무기를 철수한다고 특정하여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남한의 노태우 대통령은 이렇게 공표할 수 있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이 시각, 우리나라 어디에도 단 하나의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국 핵무기가 한반도에 있는 한 남북 간의 핵 협상은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북한의 입장에 부응하기 위해 다듬어진 발표였다."(57-8)


"그 직후인 1992년 초, 북한과 남한은 양국 모두가 〈핵무기를 실험도, 제조도, 생산도, 취득도, 보유도, 저장도, 배치도, 사용도 하지 않겠다〉 그리고 〈핵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1992년 즈음 북한은 이미 핵무기 개발에서 큰 걸음을 내디딘 상태였다. 새로 가동에 들어간 방사화학실험실에서 5MWe 원자로의 사용후 연료로부터 소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함으로써 표면상으로는 민간 용도인 영변 핵단지에서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북한의 이런 핵무기 야심에 대한 워싱턴의 우려가 커짐에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은 아직 발생기에 있는 핵 프로그램을 미국과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겠구나 깨달았다. (북한 핵 프로그램에 대한 IAEA의 안전조치를 전제로) 1993년 6월 북미회담의 무대가 마련되었고, 이 회담은 1994년 10월 최초의 핵 협상인 북미제네바합의의 조인으로 결실을 맺었다."(58-9)


3장 2004년 1월 이전의 상황


"1994년 북미제네바합의 당시, 미국 협상단을 이끌고 있던 로버트 갈루치는 이 협상이 완성되더라도 폭탄과 미사일로 가는 잠재적 경로를 모두 차단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 협상이 당시의 가장 큰 위험, 즉 플루토늄을 통해 폭탄으로 가는 길은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북한은 이미 5MWe 원자로와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포함하여 영변에서의 플루토늄 가동을 동결하고, 2000년대 초가 되면 해마다 플루토늄을 300킬로그램 가까이 생산할 수 있었을 더 큰 규모의 원자로 2기 건축을 중지하겠다고 합의한 바 있었다. 미사일과 우라늄 농축을 명시적으로 다루는 더 엄격한 제한은 실현도 검증도 불가능할 듯했다.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잠재적 확산 위험은 관리 가능한 정도로 여겨졌고, 그 비용도 주로 남한과 일본이 부담하게 될 터였다. 갈루치를 위시한 협상단은 조약을 맺을 때 필수적인 의회 승인을 피하기 위해 이 협상을 조약이 아닌 정치적 합의의 형태로 구상했다."(64-5)


"북미제네바합의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워싱턴에는 제풀에 늪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듯 보이는 밉상 정권을 구제해줄 마음이 없었다. 서울에서는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이 이 협상에 강하게 반대했다. 협상 과정에서 서울이 소외되었다고 느낀 것이 그 주된 이유였다. 그는 1994년 7월 초 김일성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해왔으나, 그달 말 김일성이 사망하자 그것으로 북한 정권의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보았고, 김일성의 아들에게 상황이 이롭게 돌아가도록 해줄 일이라면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다. 훨씬 더 큰 문제는 합의문 서명 2주 뒤 미국에서 치러진 선거 결과 민주당이 상·하원 모두에서 공화당에 다수당 자리를 내주며 완전히 판이 뒤집혔다는 사실이다." "북미제네바합의는 완전히 당파적 사안이 되어서 합의 이행을 위한 거의 모든 조치에 반대하는 측이 그 정책의 가치를 문제 삼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정책이 클린턴 정부와 엮였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65-6)


"부시 정부는 클린턴 시절 (칼을 갈며) 때를 기다리고 있던 강경파 보수 인사들을 영입했다. 그중 가장 거침없는 두 명, 존 볼턴과 로버트 조지프가 각각 국무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요직을 차지했다. 그들은 북한식 접근법은 핵 프로그램을 위한 시간을 벌려는 도발과 위기, 그후 일시적 해소의 반복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2002년 여름, 정보당국은 북한의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최신 평가를 내놓았다. 새로운 정보 보고서에는 평양이 원심분리기 프로그램을 위한 재료와 부품들을 대량 입수하려 시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담겨 있었다." "이 보고와 첨부된 정보 보고서는 이미 빈사 상태에 빠져 있던 북미제네바합의에 치명타를 날리기에 충분했다. 존 볼턴에 따르면, 그 보고서는 〈북미제네바합의를 박살내기 위해 [그가] 찾고 있던 망치〉였다. 볼턴과 같은 부시 정부의 강경파 관료들은 이 정보를 〈기만〉의 증거이자, 반드시 응징이 따라야 할 〈도덕적 모욕〉이라고 규정했다."(69-71)


"평양과의 직접 협상은─그들의 믿음대로라면, 그런 대화는 미국 외교관을 납치하려고 설계된 함정일 터이므로─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부시 정부는 다자간 협상 방식을 채택했다. 중국은 중간자적 위치의 영향력 있는 북한의 후원자로 여겨졌다. 부시 정부는 중국을 끌어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베이징에 주도적 역할을 넘기기로 했다. 중국은 지지부진한 몇차례 3자회담(북한, 중국, 미국)을 주선했고, 이후 평양이 마지못해 참여하기로 동의하면서 6자회담(남한과 일본, 러시아까지 포함)으로 알려지게 된 협상장이 열렸다." "북한은 미국에게 제네바합의 하의 의무를 지키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북한이 먼저 핵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CVID)〉에 무조건 동의해야 미국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할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평양은 더이상의 회담은 필요 없을 것으로 본다고 선언하고 정식 협상을 연기했다. 2003년 12월로 예정된 6자회담 재개 계획은 결국 백지화되었다."(75-7)


4장 〈우리가 만든 걸 좀 보시겠습니까?〉


"영변 방문 후 귀국한 나는 뉴스 매체들 모두에게 사실상 같은 얘기를 했음에도, 기사와 논평은 상이하게 나왔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사설을 통해 그들이 〈양두구육 북한 관광〉이라고 규정한 우리의 방문을 때리고, 북한이 클린턴 정부를 〈현혹시켜〉 북미제네바합의를 맺는 데 사용했던 그 똑같은 〈플루토늄 쇼〉에 넘어가지 않은 부시 정부의 결기를 칭찬했다. 모두가 곧이곧대로 설명하는 것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 당시의 나도 알았고 그 이후의 미국 정부들도 알게 되었듯이, 우리가 영변에서 목격한 것에 양두구육이라거나 눈속임 같은 것은 없었다. 내 보고를 북한이 집요하게 폭탄 제조를 추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었을텐데도, 워싱턴의 강경파들은 북한의 핵시설들을 방문할 수 있었던 사람의 보고를 폄훼하는 쪽을 더 선호했다. 방문하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사실에 입각한 보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북한에 대해서 이미 마음을 정해놓았던 것이다."(135)


"로스앨러모스로 돌아와서, 우리는 영변에서 쐬었을지도 모르는 방사선의 양을 측정해보았고, 체내 감마 방사선 초과치가 없음을 확인했다. 나는 또한 로스앨러모스의 동료들과 함께 내가 방문을 통해 발견한 바를 재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실험실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본 결과 내가 영번에서 손에 들어본 유리병에 정말로 플루토늄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영변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무기급 플루토늄을 만들 수 있으며 8천개의 사용후 연료봉을 전부 재처리했다는 북한의 주장이 믿을 만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북미제네바합의 동안 북한이 영변 밖에서 무기 설계와 무기 연구개발 활동을 계속함으로써 대비책을 세워두고 있었을 법하다는 것이 거의 명확했다. 그럴 경우, 비록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으나 당시 북한이 가장 최근에 재처리된 플루토늄을 가지고 이미 나가사키 유형의 초보적인 핵폭탄 한두개 정도는 만들었을 것이라고 나는 기꺼이 단언할 수 있었다. 실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137)


5장 볼턴의 망치가 가져온 참혹한 결과


"북미제네바합의 파기 자체도 나쁜 결정이었지만, 그 결과에 대비하지 못한 것은 더더욱 위험한 짓이었다. 영변 플루토늄 단지 동결은 북미제네바합의의 핵심 요소였다. 이것이 북한 핵 프로그램의 완전 폐기를 향한 한발짝에 불과하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것은 가장 시급한 일이기도 했다. 플루토늄 생산, 추출의 중단은 폭탄 연료가 없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1994년부터 2002년까지는 플루토늄이 생산되지 않았다. 북미제네바합의가 없었더라면 북한은 5MWe 원자로를 가동할 수 있었을 것이며, 동시에 1994년 건설 중이던 더 큰 규모의 원자로 2기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북한은 해마다 300킬로그램에 가까운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워싱턴은 지금도 5MWe가 8년 동안 가동되지 않고 더 큰 2기의 원자로 건설이 취소된 것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20년도 더 지난 지금, 내 추산으로는 북한의 플루토늄 총보유량이 50킬로그램 미만일 것이기 때문이다."(142)


"2004년 2월 말 제2차 6자회담이 열렸다. 미국 측 협상자로 나선 제임스 켈리는 CVID 원칙을 고수하고, 시작부터 우라늄 농축 문제를 포함하여 완전 공개를 밀어붙이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부시 정부의 강경파들은 리비아에서 그들이 거둔 성공을 재현할 생각이었다. '그때그때의 분납 방식'이 아닌 신속한 폐기 선행이 목표였다. 북측은 '보상을 조건으로 한 동결'을 바라고 있었다.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도 계속 부인했다. 당연하게도, 회담은 진전 없이 끝났다." "2005년 2월 북한 외무성의 고위급 성명이 나왔다. 부시가 재임을 시작하고 불과 몇주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 성명은 북한이 〈자위적 차원에서 핵무기를 제조했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보유국이 되기 위한 문턱을 넘었다는 공식 선언이었다. 놀랍게도 이 일은 워싱턴에 더 큰 긴박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워싱턴은 이것을 평양이 협상 지렛대를 얻기 위해 벌이는 술수 정도로 보았던 것이다."(151-2)


6장 다시 북한으로: 〈해가 서쪽에서 뜨기 전에는 경수로는 안 돼〉


"존 루이스와 나는 두 번째 북한 방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5년 9월 8일,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의 국무부 집무실을 찾았다. 나는 라이스 장관에게 기술적인 면에서 5MWe 원자로가 대략 26개월동안 전출력으로 가동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점, 리홍섭 소장이 그 원자로가 앞으로도 수십년 더 운영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지난 방문 이후 북한은 그들의 재처리 효율과 속도를 높여왔다. 그들은 2차 완전 재처리 작업을 완료하는 중이었으며 폭탄을 두 개 더 만들기에 충분한 10~12킬로그램의 플루토늄을 추출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리 소장은 아직도 지난 10년간 방치되어 있던 50MWe 원자로 건설을 재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2004년 방문 당시 우리가 본 바로는 그 원자로는 복구 불가능해 보였으나 리 소장은 여전히 그것을 완공할 방법을 모색 중이었다. 그의 말로, 200MWe 원자로는 완전히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여서 아마도 그냥 포기할 가능성이 컸다."(191)


"우리는 김계관 부상의 경수로를 요구하는 단호한 주장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그가 우리와의 대화를 〈경수로 없이는 합의도 없다〉는 말로─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끝냈다고 말이다." "나는 만약 북한이 그들의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택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 길로 미래 어느 시점에 경수로가 들어온다면 그것도 위험을 감수할 만한 괜찮은 거래일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아무 합의 없이 계속 플루토늄이 생산될 수도 있는 다른 선택지를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랬다. 경수로를 지원하면서 북한에서의 우라늄 농축이나 재처리를 금지하는 합의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사실 김계관 부상은 그런 것들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친 바 있었다. 존 루이스와 나는 정부가 미래의 경수로를 위해 당분간 KEDO 조직을 원래대로 유지하기를 제안했다. 라이스 장관은 이런 주장에 다른 의견을 비치지 않았으나, 이날로부터 11일 후 6자회담 다음 회기에서 힐은 KEDO가 그해 말 해산될 것이라고 선언했다."(192-3)


"이 시점 북한은 기껏해야 서너개의 원시적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을 실험해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 폭탄을 확실하게 운반할 수 있는 검증된 미사일 체계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2002년 중대 경제개혁을 개시한 김정일의 입장에서 보아도 외교는 중요했다. 그런 개혁들이 성공하려면 우호적인 대외 안보 환경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외교적 협상 모색은 비록 그동안 핵 프로그램 추진을 멈출 의도는 없었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 힐의 노력이 6자회담 공동선언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밥 조지프와 그의 일당은 미국의 독자 성명에 담긴 터무니없는 요구로 6자회담 과정을 장악하고 완전히 탈선시키는 일을 해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군비 축소를 주장한 것, KEDO 해산을 선언한 것, 그리고 〈적절한 시기〉를 먼 미래로 못 박은 것, 이것들의 조합은 강경파들의 승리로 판명났다. 미국의 강경파은 공동선언이 시험받을 기회조차 없애버렸다."(205-3)


7장 김정일: 시간을 벌다


"2005년 9월 이후 (북한) 외교의 역할은 이제 핵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핵·미사일 개발을 추진할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공동선언 이후 며칠 동안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계속해서 강경 노선을 밟았다. 라이스 장관은 미국이 경수로를 '논의'라도 할 마음을 먹으려면 북측의 군비 축소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은 검증 조항들이 공동성명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그런 것들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어떤 합의든 검증하기 위해서는 북한 전체를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는 미국인들이 검증을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분명 이 모든 것들이 북한에게는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지만, 북한 외무성은 자신들이 여전히 〈기존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NPT에 돌아가며 IAEA의 시찰을 허용할 것을 공약한다〉는 인상을 풍겼다. 이런 언급들은 북한이 외교에 한발을 걸치고 있음으로써 핵개발을 위한 시간을 벌려고 했다는 사실과 더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209-10)


"2006년 10월 9일 아침 이른 시각에 평양은 임박한 핵실험의 시간과 장소, 예상 폭발력을 베이징에 통지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행했다. 그 어떤 나라도 최초의 핵실험을 하면서 그런 통지를 한 적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세계의 지진관측소들이 북한 동북부의 평계리 부근으로부터 퍼져나오는 약하나마 분명한 신호를 기록했다. 약한 신호는 낮은 폭발력을 의미했으나, 북한이 여덟번째 핵 선언 국가가 된 것만은 분명했다. 곧바로 전세계로부터의 규탄이 잇달았으나, 북한이 핵의 길로 가지 않도록 막으려던 모든 노력이 실패했음을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험 전 백악관이 보여주었던 매파 전선은 거의 하룻밤 새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응징을 강조하며 강경파들이 유엔 결의안을 받아냈지만, 대통령과 라이스 장관에게는 부시 정부 6년 동안 그들이 북한을 상대해온 그 모든 일들이 효과가 없었다는 점이 명확해졌을 것이다. 그들은 외교적 해법을 좇는 방향으로 재빨리 선회했다."(220-1)


8장 〈미국에 성공이라고 전하시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부심이 넘칩니다.〉


"핵실험이 끝나자마자, 서방 분석가들 대부분은 이번 실험이 미미한 핵 폭발력만을 보여주며 끝났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걸 덮어버릴 그것의 의미를 간과했다. 폭발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자신이 핵보유국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했음을 선언했다. 나에게 가장 놀라웠던 것은 북한이 국제사회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 정치적 결과를 관리하는 동안 보여준 그 능란함이었다. 미국, 남한, 일본, 심지어는 중국까지 예상된 규탄을 쏟아내고 난 후, 그들은 모두 북한을 달래 다시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려는 옛 입장으로 즉시 돌아갔다. 그리고 평양은 그것을 마다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북한 외교관들은 핵실험이 억지력, 대등한 지위, 그리고 6자회담에 돌아갈 힘을 주었다고 믿었다. 나는 서면 개요를 준비해 워싱턴DC에서 열리는 내셔널프레스클럽의 공청회에서 그것을 발표했다. 그 공청회가 열린 워싱턴DC에서는 미국 정부가 북한의 핵실험을 안절부절 못하는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228, 253-4)


9장 2007년: 다시 협상 테이블로


"평양은 핵실험으로 국내외적 이익을 얻었지만, 핵무기를 보유하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즉 안보 강화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 그 실험의 성공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공에 못 미치는 실험을 시행했다는 사실이 평양을 안보 측면에서 이전보다 더 열악한 상태에 놓이게 했다. 핵 억지력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그 실험이 없었더라면 더 믿을 만하고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었다. 북한의 실제 능력에 대한 모호함이 남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실험은 틀림없이 북한의 핵 전문가들에게 문제점을 고칠 방법에 대한 값진 기술적 통찰력을 부여해주었겠지만, 그것은 핵 장치를 실전 배치할 수 없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었고 이는 곧 북한이 다시 핵실험을 실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북한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2차 핵실험으로 가는 기술적 진로는 상당히 곧게 뻗어 있었다. 북한의 설계자와 엔지니어들은 아마 첫 폭발 바로 다음 날부터 작업에 착수했을 것이다. 정치적 진로는 그만큼 확실하지는 않았다."(259)


"나는 김정일이 1차 핵실험으로 배척(혹은 군사적 대응)보다는 오히려 외교적 지렛대를 얻은 것 같다는 점을 깨닫고, 김계관을 비롯한 외교관들에게 워싱턴과의 관계 정상화를 진전시킬 협상을 이룰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한번 더 기회를 주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외교가 잘 풀리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핵·미사일 팀에게 작업을 계속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중경로 전략의 두 갈래 길 모두에 청신호가 켜진 것이었다. 외교가 핵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시간 벌기에 불과했던 2002~2006년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2007년 10월 3일자 2차 행동 성명에서 미국은 북한에게 그해 말까지 모든 핵 프로그램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신고하라고 주문했다. 평양도 영변의 시설들을 불능화하는 것에는 동의했고, 핵 물질이나 기술, 노하우를 이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반복했다. 이 두번째 약속은 시리아 사태 이후 이렇게 이른 시기에 북한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분명 뻔뻔스러운 얘기였다."(265-8)


# 시리아 사태 : 2007년 9월 6일 이스라엘이, 북한의 도움을 받아 건설 중이던 시리아의 원자로를 공습해 폭파한 사건


10장 2007년과 2008년의 방문: 불능화 확인을 위해 다시 영변으로


"영변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들이 보기에 불능화 조치의 목적은 그들의 시설을 다시 가동하기 어렵게,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게 만드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5MWe 원자로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불능화 조치로 원자로 외부의 보조 냉각관이 절단되어 바닥에 놓여 있는 모습 등을 보여주었다." "6월에는 해외 뉴스 매체들 앞에서 대대적으로 팡파르를 울리며 냉각탑을 날려버렸다. 북한은─두 대의 대형 이산화탄소 송풍기를 제거한다거나 노심을 못 쓰게 만들기 위해 가돌리늄을 붓는 것 같은─더 영구적인 불능화 조치에 대한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당분간은 미국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불능화 단계를 돌이킬 수 있는 정도까지만 계획하고 있다고 다시 강조했다. 이는 북한이 추구하고 있는 이중경로 접근법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그런 노선이 어떤 것인지를 더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절대로 한쪽 경로에만 몰두하지 말 것. 항상 다른 길을 열어놓을 것."(298-300)


"미국으로 돌아온 후 나의 결론은, 만약 미국을 비롯한 다른 4개 당사국이 2007년 10월의 약속을 지킨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부가 플루토늄 생산시설을 영구 폐쇄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협상이 실패할 경우 그 시설들을 재가동하기 위한 대비책도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취해진 불능화 조치가 차후 있을 수 있는 플루토늄 생산 재개를 효과적으로 지연시킬 것임을 확인했다. 영변 플루토늄 생산 단지의 영구 폐쇄라는 결실을 보려면 불능화 단계를 완료하고 완전 폐기 단계로 나아가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터였다. 이런 일이 이뤄진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폭탄을 더이상 만들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시점이 되면 북한에 남은 것은 플루토늄 생산 시설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HEU 프로그램은 아직 생산 단계에까진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추가적 핵실험이 없는 한 북한은 더 성능 좋은 폭탄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었다."(311-2)


# HEU :  고농축 우라늄


11장 2008년: 거의 다 와서 모든 것이 무너지다


"힐과 김계관은 2008년 3월에 제네바, 4월에는 싱가포르에서 만나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합의에 도달했다. 미국 입장에서 합의의 핵심 목적은, 북한이 5MWe 원자로의 불능화를 완결하고 플루토늄 비축량을 빠짐없이 설명하도록 그 앞길을 치우는 것이었다. 그에 호응하여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고 적과의 거래행위법에서 면제해주기로 되어있었다. 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힐은 중대한 양보를 했다. 그는 북한이 공개적으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과 시리아에서의 핵확산 행위에 대해 확인하거나 시인할 필요 없이 그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기존 입장을 완화한 것이다." "워싱턴의 대체적인 반응은 신속하고도 가차없었다. 힐은 북한에 미국을 팔아넘긴 인물로 여겨졌고, 워싱턴의 대외정책 관련 기관들 대부분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당했다. 당시 정부 밖에서 의견을 내던 존 볼턴은 힐의 행보를 〈빌 클린턴이나 지미 카터의 대본에서 나온 것 같다〉며 조롱조로 평가했다."(323-4)


"7월 둘째 주 베이징에서 열리는 6자회담에 참석하는 힐의 손에는 드서터가 작성한 비타협적 검증 프로토콜이 들려 있었다. 그 검증 프로토콜은 북한은 미국이 의심하는 어떤 현장에서든 모든 물질에 대한 완전한 접근을 허가할 것, 검증단이 분석용 샘플을 국외로 반출하도록 허용할 것, 핵 물질과 핵 관련 장비의 전체 수출입 기록을 제공할 것 등을 명시했다. 이런 강경 노선의 요구를 듣고 김계관은 격노했다." "뒤이어 부시 대통령은 방콕 방문 연설 중에 까다로운 추가 요구를 제시했다. 그는 우라늄 농축과 확산 행위도 검증 조치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북한이 〈폭정을 끝내고 자기 주민들의 존엄과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까지 말해버렸다. 북한과 무슨 일을 이루어낼 만큼 힐의 백악관 내 입지가 확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결국 8월 26일 평양은 영변 핵심 핵시설의 불능화를 중단하고 그 시설들을 〈원래 상태로〉 복구하기 위한 조치를 고려할 것이라고 선언했다."(328-30)


12장 2009년의 방문: 〈어디까지 나빠질지는 모르는 겁니다.〉


"2008년 여름 김정일이 뇌졸증을 앓게 되면서 게임은 끝이 났다. 평양은 김정은 승계계획을 탄탄대로에 올려놓기 위해 핵 노선을 전면으로 끌어올리고 외교는 필요하다 하더라도 시간을 벌기 위한 조역 정도에 두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평양이 오바마 정부를 향해 떡밥을 던져놓은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북한이 위성 발사를 실행하고, 그러면 미 정부가 어쩔 수 없이 2006년 발사에 대응하며 세운 선례에 비추어 강력한 유엔 안보리 제재를 요구하게 되는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다시 평양은 2차 핵실험을 실시할 정당성을 얻게 될 터였다. 2차 핵실험은 세계에, 그리고 스스로 제기능을 할 수 있는 핵무기가 있다는 것을 믿도록 만들기 위해 복한으로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북한이 7월 미사일 발사를 시도하고, 부시 정부가 그것을 이용해 유엔 안보리 제재에 대한 지지를 끌어오므고, 이에 북한이 10월의 1차 핵실험으로 맞대응한 2006년의 사태를 다시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343)


13장 2009년과 2010년: 오바마가 내민 손을 외면하다


"2009년 4월 5일 늦은 오전 북한은 동해위성발사장에서 이미 통보했던 위성 발사를 시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로켓 발사는 도발 행위이자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18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런 행위가 평양을 국제사회로부터 더욱 고립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는 이것을 임기 초 그의 지도력에 대한 시험이라고 여겼다." "미 정부는 4월 12일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성명을 주도해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북한의 위성 발사를 규탄하면서 결의안 1718을 준수하고 미사일 실험을 멈출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방면에서〉 자국 수호를 위한 핵 억지력을 높여갈 것이며 경수로 건설을 검토하고 2007년과 2008년 불능화된 시설들을 복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위성을 궤도 진입시키는 기술적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평양의 정치적 목표는 달성되었다. 미국의 대응은 2009년 5월 25일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하도록 앞길을 닦아주었다."(353-5)


"한편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금융 시스템의 붕괴와 그것의 국제적 여파를 해결하는 일에 몰두해야 했다.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정부 초기의 판단은 오바마의 남은 임기 동안에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동북 아시아 내에서도 북한은 이웃 나라들과 별로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2009년 8월 전 대통령 전 대통령 김대중의 장례식에 대표단을 보내면서 김정일은 남한과의 더 나은 관계 및 이명박과의 남북회담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이 막대한 보상 보따리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김정일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워싱턴의 어법을 흉내라도 내듯 〈그는 평양에 있는 그 고집 센 정권에게 (···) 단지 대화에 합의했다는 것만으로 보상을 주는 패턴을 깨고 싶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도쿄도 납북자 문제에 집중하며 평양을 향한 강경책을 견지했다. 베이징 역시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중국의 불만 때문에 양국 관계가 다시 악화된 상태였다."(358-62)


"미 정부는 클린턴 장관이 〈전략적 인내〉라고 칭한 기조로 정착하는 중이었다. '전략적 인내'란 북한 측의 〈못된 행동에 보상하는 것〉에 대한 공공연한 반감을 중심으로 하고,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끝낼 협상에 진지한 열의를 보여주는 경우에만 고위급 회담으로 돌아가겠다는 조건부 의지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또 도발 행위에 대한 대응으로 평양을 향한 경제적·외교적 압박의 수위를 점진적으로 높여가는 일이 그뒤를 따랐다." "2010년 3월 26일 북한의 공격으로 서해에서 초계 중이던 천안함이 침몰하고 46명의 해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북한과 남한 및 미국의 관계는 특히 긴장감을 띠게 되었다. 4월 오바마 정부가 핵태세검토보고서를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북한과 이란이 '열외국', 즉 미 핵무기의 공격 목표가 될 수 있는 예외적 국가로 분류되었다. 5월 국제조사단은 천암함 침몰에 북한의 책임이 있음을 명시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과의 거의 모든 교역을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365-6)


14장 2010년 방문: 〈내일이면 더 놀라게 될 겁니다.〉


"외무성 신임 부상 리용호는 오바마 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하나의 국가로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적으로만 바라본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전세계 192개 국가 중 188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이란, 쿠바, 부탄,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맺지 않았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는 미국이 공화국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한 정상적인 대화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더욱이 오바마 정부의 이른바 전략적 인내 정책은 공화국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생각해내지 못한 워싱턴의 무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평양에는 전략적 인내가 북한에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경수로를 마무리하고 그 [저농축 우라늄] 연료를 생산할 시간을 줍니다. 우리는 기다릴 수 있어요. 시간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니 말입니다.〉 리 부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기는 미국이 공화국에 계속 적대적으로 나오는 한 그들 옆에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391-2)


"귀국 후 나는 정부 인사 다수와 대중들이 미국 첩보의 실패라고 부르는 사건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어떻게 북한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감시를 받는 곳에 현대적 원심분리기 시설을 짓는 동안 그것을 감지하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핵 원자로와 달리 원심분리기 시설이 숨기기 쉽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이 2천대의 원심분리기를 엄밀한 감시를 받는 영변 핵단지에 들여오면서 미국 정보계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경고 신호였다." "우리는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것을 막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을 우리가 바꾸고자 하는 방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대하라는 페리 프로세스의 권고를 재차 언급했다." "하지만 북한이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우리가 클린턴 장관에게 브리핑을 한 바로 그날, 11월 23일 북한은 서해 분쟁 해역에서 남한이 영유한 여러 섬 중 하나인 연평도를 포격했다. 이 포격으로 남한 해병 2명, 건설노동자 2명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394-6)


15장 2010년 11월부터 2012년 4월까지: 로켓과 함께 날아간 협상


"2012년 3월 16일, 북한은 4월 15일 김일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극궤도 지구관측위성 광명성 3호를 발사할 생각이라고 발표했다. 미 국무부는 이에 대응하여 윤달 합의에 미사일 실험 및 위성 발사 금지가 명기되어 있음을 언급했다. 위성 발사는 위장된 (장거리) 미사일 개발일 수 있으며 ICBM 기술의 로켓 발사를 금지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위반이 될 것이라고 했다." "며칠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대변인은 우주조약에 따르면 북한에 발사를 실행할 권한이 있음을 지적하며, 북한의 평화로운 위성 발사 계획에 대한 정식 담화를 내놓았다. 북한은 또 운반용 로켓 잔해가 인접국들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안전한 비행 궤도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2012년 2월 29일에 북미 양국이 각자 발표한) 윤달 합의의 가장 큰 패착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 모라토리엄에 무엇이 포함되는지에 대해 양측이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는 데 있었다. 그 합의는 건설적 모호함의 산물이었다."(408-9)


"김정은은 4월 13일 위성 발사를 강행했다. 그의 할아버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위성 발사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 오래전에 내린 결정이었다. 새로 지도자가 된 그가 이 계획을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발사 시도 후 백악관은 예상했던 그대로 식량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바마 정부는 유엔 안보리를 통한 추가 제재나 다른 징계를 추진할 계획은 없었고, 그보다는 기존 유엔 결의안의 집행 강화를 추진할 계획이었다. 정부는 더이상의 대화 진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북한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길을 가고 있으며,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이 다시 미국의 〈사전 조치〉에 부응할 때에만 대화에 나설 것이라는 백악관 성명이 발표됐다." "4월 18일, 윤달 합의가 북한의 위성 발사 때문에 폐기되었다는 미국의 성명이 반복되어 나오던 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도 협의를 폐기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이 외교의 길을 뒤로 하고 다시 핵 노선으로 향할 길이 열린 셈이었다."(410-2)


16장 〈멍청한 로켓 발사 한번 때문에 미국은 이걸 다 날리는 건가?〉


"윤달 합의의 파국은 미국의 정책과 기술적 평가가 유리된 또 하나의 예였다. 위성을 궤도에 올리려는 북한의 시도를 이유로 윤달 합의를 파기함으로써 오바마 정부는 감시자들을 영변 핵단지 현장에 다시 돌려놓고 그곳 원심분리기의 회전을 멈추고 또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실험 모라토리엄을 이룰 기회를 놓쳐버렸다. 미국이 영양 원조 20만톤을 약속하기만 했다면 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이 발사를 평양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어도 될 만한 상대인지 알아볼 리트머스 시험지로 이용했다. 그런 시험은 워싱턴의 기준으로는 낙제점을 받도록 정해져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북한은 미국이나 유엔 안보리가 뭐라고 하든 줄곧 자기들은 위성 발사를 주권 사항이라고 여긴다는 주장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설정된 리트머스 시험이라면 평양이 그 상투적인 순환고리를 따르고 있다는 대통령의 믿음을 재확해줄 수밖에 없을 터였다."(416-7)


17장 전략적 인내에서 점잖은 무시로


"2013년 2월 12일 오바마 대통령이 두번째 임기를 시작한 직후, 평계리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가 그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북한의 3차 핵실험이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7에서 14킬로톤의 핵폭발 위력을 기록했다. 2차 핵실험보다 크고 히로시마 폭발과 비슷한 규모였다. 평양은 이번 실험이 설계 목표에 도달했으며 이로써 그들의 핵 억지력이 〈다각화〉되었음을 증명했다고 발표했다." "이 3차 핵실험은 1기 오바마 정부의 대북 정책 실패에 느낌표를 찍는 사건이었으나 워싱턴이 그들의 전략을 재검토하도록 이끌지는 못했다." "2013년 여름이 되자 오바마 대통령은 그가 이란에 한 제안에서 돌파구가 열릴 가능성을 보고 북한 문제에서는 더욱 손을 떼게 되었다. 8월 이란의 온건파 정치인, 특히 싸움꾼인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와 비교했을 때 훨씬 온건한 하산 로하니가 이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오바마는 로하니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이란과의 대화 재개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428-30)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의 폭발력은 3차 핵실험과 마찬가지로 7~14킬로톤 규모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그들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으며 그 실험은 〈소형 수소폭탄의 위력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발표했다." "2016년 9월 북한은 그들이 5차 핵실험을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기연구소(NWI)가 성명을 내어 그 실험이 〈마침내 화성 포대의 전략 탄도 로켓에 탑재할 수 있도록 규격화된 핵탄두 운동의 구조와 특성을 시험하고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이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다양한 핵분열 물질을 생산하고 이용하는 기술을 확고히 하여 더 강력한 타격력을 지닌 더 작고 더 가벼우며 다각화된, 다양한 핵탄두를 필요한 만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며 탄두의 '규격화'를 칭송했다." "설득력 있는 증거는 못 내놓았지만, 북한은 한가지만은 확실히 했다. 이것이 그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며, 9월의 핵실험은 중요한 또 한걸음이라는 것이었다."(437-9)


"그것이 전략적 인내였든, 깊은 불신이었든, 점잖은 무시였든 간에 오바마 정부는 북한의 위협을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최우선으로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들은 그 문제를 무시무시한 경고와 함께 트럼프에게 넘겨버렸다." "그들은 공직에서 물러나 정부에 몸담았던 시절에 대한 회고록을 쓰면서도, 전 대통령을 필두로 해서 핵심 관료들 모두가 하나같이 북한을 뒷전 취급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할 때 한차례 핵실험을 실시했고 초보적 핵무기 다섯개 정도를 만들 만큼 플루토늄을 축적해놓았으나 이런 것을 미사일로 실어 나를 역량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백악관을 떠나는 시점에 북한은 네차례 더 핵실험 경험을 쌓았고 대략 25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충분한 플루토늄과 고농축 우라늄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십수번의 미사일 실험 성공을 통해 미사일 역량을 인상적으로 증명한 상태였다. 김정은은 마침내 지역 내 미국의 자산과 우방을 위협하는 핵무력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444-5)


18장 2017년의 〈화염과 분노〉


"미사일 분석가 마커스 실러는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이 해외로부터의 지원과 조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지난 몇년에 걸쳐 북한의 미사일 발사율이 다른 미사일 개발 국가들의 경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실험 횟수는 너무 적은데 성공률은 너무 높다는 것이었다. 예외라면 높은 실패율을 기록한 위성 발사와 무수단 미사일이 있는데 이 둘은 모두 아마도 북한 로켓 중 가장 토착적이었을 것이다." "김정은 지도 하의 북한은 훨씬 더 많은 횟수(2017년에만 24차례 시행)의 시험 발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실험 패턴까지 변경해 기존의 실험장에서만 하던 방식을 벗어나 북한 전역을 옮겨다니며 발사를 실행했다. 핵위협방지구상/비확산연구센터의 분석가들은 이것을 엄청나게 중요한 전략 전환이라고 칭했다. 달리 표현해, 이번 발사 훈련들은 이 정권이 가지고 있을 법한 전국의 미사일 부대에 핵무기를 배치하려는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460-1)


"2017년 12월 초, 전직 고위 외교관이자 정무 담당 차관인 제프리 펠트먼 유엔 수석특사가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김정은에게 보내는 친서를 들고 북한을 방문했다." "펠트먼은 그로부터 3년도 더 지난 후 BBC에 출현해, 2017년 말 평양 방문 초청을 받은 경위와 미 국무부가 그의 방문을 탐탁치 않아 했던 당시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몇주 뒤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북한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았다. 구테흐스는 트럼프에게 〈제프 펠트먼이 평양으로 와서 북한 사람들과의 정책 대화를 이끌어달라는 이상한 초청을 받았음〉을 알려주었다. 이에 트럼프가 구테흐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이렇게 말했다고 펠트먼이 말했다. 〈제프 펠트먼은 평양에 가야죠. 가서 북한 사람들에게 내가 기꺼이 김정은과 마주 앉을 용의가 있다는 말을 전하라고 하세요.〉 2017년 트럼프가 김정은과 대립하던 하나의 장을 닫고 2018년 극적으로 180도 방향 전환을 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제안이었다고 나는 믿는다."(478-9)


19장 올림픽에서 싱가포르에서


"트럼프의 시선이 온통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에 꽂혀 있던 이때, 맥매스터를 볼턴으로 교체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볼턴은 외교 자체를 매우 회의적으로 보았고 북한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트럼프는 보좌관들에게 자기는 〈지금의 추진력을 놓치고〉 싶지 않다며, 〈이거야말로 큰 건이다. 만일 우리가 협상을 이뤄낸다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협상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볼턴은 트럼프의 심경 변화에 대해 〈그것은 낙심천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거의 그 덫을 피할 수 있을 뻔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에게 그 덫이란 김정은과의 싱가포르 회담 개최였다. 『그 일이 일어난 방』에서 볼턴은, 어차피 싱가포르 회담이 진행될 것이라면 〈법적 구속력이 있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트럼프가 덜컥 동의해버릴 수도 있는 부적절한 문서의 해악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어야 함을 깨달았다고 진술한다."(488-91)


"볼턴이 계획했던 그대로, 싱가포르 성명에는 트럼프가 덜컥 동의해버릴 수도 있는 부적절한 문서의 해악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 어떤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항도 담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북한이 내세우던 〈단계적·동시적 행동〉도 피할 수 있었다. 북한은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커다란 진전으로 보았다. 북한 국영 매체는 굉장한 성공이라고 이 회담을 치켜세우며 공식적인 공동성명처럼 읽히는 상세한 보도를 했다." "이제 정상회담의 약속을 현실화하는 어려운 외교적 작업이 시작될 차례였다. 그러나 양측이 두 정상의 만남을 바라보는 방식에 이견이 있었고, 그것이 앞으로 나가려는 걸음의 발목을 잡을 터였다. 트럼프의 발언은 더 안전한 세계를 만들었다든지 김정은과 개인적 관계를 확립했다든지 하는 그의 주장처럼, 주로 정상회담의 업적이라고 스스로 평하는 것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북한에게는 이것이 워싱턴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수십년 묵은 한반도의 반목을 해소할 기회였다."(499-500)


20장 하노이의 탈선 열차


"볼턴은 7월 초 평양 재방문 준비를 하는 폼페이오에게 미국이 평양으로부터 〈그들의 핵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신고를 제공한다〉는 확약을 받기 전까지는 그 어떤 진지한 협상도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그러면 1년 안에〉 군축 작업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볼턴은 이것이 협상을 믿고 진행해도 될지 시험해볼 기회이자 김정은이 싱가포르 합의를 진짜로 지킬 생각이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될 것이라고 했다. 볼턴에 따르면 폼페이오도 원칙상 동의하고 그의 협상작전에 적용했다고 하는, 이런 충고가 협상 과정 전체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에게 싱가포르 합의는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 시작보다는 종전선언을 통한 〈평화체제〉 확립에 더 집중하는 과정을 의미했다."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약속을 시험하고자 했던 것과 유사하게, 평양이 전쟁 종식 선언에 집중하는 것은 북한과의 신뢰를 쌓고자 하는 워싱턴의 〈강력한 의지〉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505-7)


"2018년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열린 평양 정상회담에서 김정은과 문재인은 앞길에 대해 유사한 구상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김정은은 경제 쪽으로 선회할 생각이었고 문재인은 남한과 북한의 경제적 통합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정상회담을 찍은 사진들은 거의 형제애에 가까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김정은은 문재인이 핵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따라서 그 문제에 관해서는 워싱턴의 정책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상황이었다." "외교 전선에서 실무를 맡은 비건의 가장 큰 도전은 워싱턴 내부로부터 왔다. 볼턴은 북한의 완전 항복에 미달하는 모든 합의를 막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볼턴의 관점은 NSC 관계자들 다수가 원칙적으로 공유하고 있었고, 비건의 상급자인 폼페이오 장관도 대체로는 그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맨 위에 있는 트럼프는 그만의 의제를 고수했다. 언론을 사로잡고 국내 정치에서 이익을 챙겨줄 대타협을 성사시키는 데 중점을 둔 의제였다."(512-3)


"제재 해제라는 사안은 하노이 정상회담의 실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볼턴에 따르면,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협상을 깬 것은 바로 제재를 해제하라는 그의 제안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회담 중 제재 해제를 트럼프에게 내민 경위를 우리는 알 수 없다. 미국 쪽에서는 김정은이 요구하는 것의 가격이 너무 높다는 데에 의견일치가 있는 듯 보였다. 평양은 민간 분야에 대한 제재 해제를 원한 반면, 워싱턴은 북한을 비핵화로 몰 수 있는 데 필요한 최대 압박을 가하는 것이 바로 그런 제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압박 작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강경파 제재 옹호론자들은 이런 실패에 대해 언제나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충분히 엄격하지 않았고 충분히 오래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아한 점은 리용호 외무상이 기자회견에서 제재 해제는 북한이 최우선 과제가 아니었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 측은 평양의 비핵화 제안과 제재 해제 요구 사이의 간극이 하노이에서 풀기에는 너무 크다고 보았다."(530-1)


21장 관측을 마무리하며: 변곡점과 실수


"나는 왜, 3대를 이어온 북한의 김씨 정권이 각각 중요한 시기마다 미국에 진정한 가능성을 제공하는 외교를 추구한다고 믿게 되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북한이 (이중경로 전략 속에서도) 이 외교 노선을 그 나라의 대외 안보 상황을 개선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핵무력이 아니라 주적과의 화해를 통해 체제 안정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북한은 이를 통해 경제를 개발하고 중국의 그늘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숨 쉴 공간을 확보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달리 말해, 평양은 그들의 생존에는 핵무기가 도움이 되겠지만 번영을 위해서는 외교가 필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셈법이 워싱턴에 여러번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때마다 워싱턴은 그것을 허비해버렸다." "변곡점은 관리가능한 정도의 위험만 감수하면 평양이 핵무기 폐기로 가는 외교의 길을 따라나서도록 워싱턴이 효과적으로 유도할 가능성이 있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이 결정한 미국의 정책은 한반도의 핵 위험을 오히려 악화했다."(543-5)


"가장 치명적인 분기점은 부시 정부가 합의를 깨는 일의 위험을 충분히 평가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1994년 북미제네바합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2002년 10월이었다. 클린턴 정부가 끝날 때 북한은 핵무기가 없었다. 고작해야 몇킬로그램도 안 되는 플루토늄뿐, 플루토늄 생산 활동도 없었다. 비축된 농축 우라눔도 없었을 것이며 원심분리기 프로그램은 걸음마 단계였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미사일 발사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지 4년이 되어가던 때였고, 그 모라토리엄으로 미사일의 사거리와 정교함을 발전시킬 능력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북한에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가장 좋은 기회였다." "협상 파기에 대해 부시 정부가 명시적으로 밝힌 이유는 평양이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을 추진함으로써 북미제네바합의를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진짜 이유는 주로 정치적인 것으로, 클린턴 정부의 중요한 대외정책 업적 중 하나인 〈북미제네바합의에 대못을 받으려는〉 것이었다."(545-6)


"하노이가 (또다른) 가장 심각한 변곡점인 이유는 정상회담이 열릴 즈음에 이미 북한의 핵무력이 규모와 정교화 면에서 막대하게 성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핵단지는 점점 더 강력해지는 핵폭탄을 연이어 실험함으로써 주목할 만한 성공을 보여주었다. 전략로케트군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군산 복합체도 계속해서 인상적인 미사일 발전상을 알렸다. 그들은 정권이 쉽게 폐쇄해버리기는 어려울 정도의 규모로 성장한 상태였고 아마 그 영향력도 커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노이에서의 김정은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감축하는 대담한 조치를 취할 의지가 있어 보였다. 그가 트럼프에게 말한 대로, 그 모든 일이 단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었겠지만 그는 미국이 관계 정상화를 향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상응하여 그 방향으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노이에서 걸려 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전의 변곡점에서 협상을 피하기보다는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어야 했지만, 워싱턴은 그러지 못했다."(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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