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nana35님의 서재
  • 예술의 조건
  • 오타베 다네히사
  • 18,000원 (10%1,000)
  • 2012-08-20
  • : 286

서문


"근대 미학의 확립은, '예술'을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예술', '예술가', '예술작품', '창조', '독창성' 같은)의 확립을 수반하며, 이 개념들이 미학을 내부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미학으로 몰리게 한 동인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제도로서 확립된 '미학'의 내부에서는 그 답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미학'의 외부에 있는 것이 '배경'(地)이 되어, '미학'이 '형상'(圖)으로서 성립하는 것을 지탱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이 표제에 '조건' 내지 '경계'라는 말을 사용한 데는 그 내부와 외부, 혹은 '형상'과 '배경'의 관계를 주제로 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여기서는 다양한 '배경'이 미학이라는 하나의 '형상'을 부각하는 메커니즘에 주목하면서 배경과 형상의 교차에 근거하여 미학의 역사를 묘사하는 것, 혹은 다양한 문맥에 속하는 논의 가운데서 '하나의' 미학사를 읽어내려 하는 학문적 관심 그 자체를 반성하고, 제도로서의 '미학'을 내부로부터 외부로 개시하는 것, 이것을 목표로 한다."(5-6)


프롤로그 중심의 상실


"괴테는 『문학상의 상퀼로트주의』(1795)에서 '중심의 상실'을 언급한다." "괴테에 의하면, '고전적인 국민 작가'가 가능한 상황은 '자국의 역사에서 위대한 사건과 그 결과'가 '훌륭하고 의미 깊은 통일'을 갖춘 경우이다. 그러나 당대의 독일에는 이런 '조건'이 결여되어 있었다. 사람들을 사회적·문화적으로 하나로 결합하는 '보편적인 국민 문화'라는 '중심점'의 결여야말로, 현대에 이르러 고전성이 결여된 원인이다." "반反상퀼로티즘을 표방한 괴테는, 자신의 논의가 지닌 비정치성(이라는 정치성)을 관철하여, 18세기 후반의 독일 작가들이 만들어온 '보이지 않는 학교'에서 '보편적인 국민 문화'가 성립되었다고 말한다. 즉, '고전적 작가'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점'은 독일 작가들이 '노력'한 결과로 이제야 다시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괴테의 논의는, 미학 이론상으로도, 비정치적 정치성으로도 확실히 '고전주의'적이다. 그럼에도 괴테의 바로 이런 논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낭만주의' 운동의 한 출발점이 된다."(21-3)


"이 역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인물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문학에 관한 대화』(1800)에서 루도비코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가 신화를 획득하거나, 혹은 차라리 신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진지하게 협력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이전에 존재했던 신화의 부활 내지 복고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새로운 신화'를 의미한다. '오래된 신화'와 '새로운 신화'는 대조적인 방식으로 성립한다. '오래된 신화'는 〈감성적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것, 생동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형성〉된 자연적 신화이다. 그에 반해 '새로운 신화'는 〈정신의 가장 심원한 깊이에서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출처가 있다. 도대체 '정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자기 자신의 외부로 나감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내부로 회귀하는 교체를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에 있다. 이 정신의 힘에 의해서만, '인류'는 〈자신의 잃어버렸던 중심점을 다시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25)


"『아테네움』(1798) 제116단장斷章의 말을 상기해보자. 〈낭만적 문학은 어떤 실재적 관심에서도 관념적 관심에서도 자유로이, 시적 반성의 날개에 올라타고 양자의 중간에 떠다니며, 늘 이 반성을 거듭하여 무한한 계열의 거울과 같이 이 반성을 다수화한다.〉 이 반성의 과정 속에서만 '낭만적 문학'은 성립한다. 그러므로 〈낭만적 종류의 문학은 여전히 생성 중에 있다. 아니, 영원히 생성할 수 있을 뿐이므로 결코 완성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그 고유의 본질이다.〉 이런 의미에서, '낭만적 문학'은 '발전적=전진적progressiv'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발전성 내지 전진성은 단순히 한 장르로서 '낭만주의' 문학의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 일반의 본질을 구성한다. 〈모든 문학은 낭만적이며 혹은 낭만적이어야 한다.〉" "슐레겔에서 '중심점'의 결여는 근대적 정신의 (편파적인) 관념성에서 유래한다. 이 관념적 원리의 편파성을 '정신의 본질'에 근거하여 전진적 내지 발전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낭만주의의 과제이다."(26-7)


"그리스·로마의 고전기를 이상으로 하는 '고전주의'도, 중세를 이상으로 하는 '낭만주의'도, 역사상의 어떤 과거 속에서 자신의 기원을 추구하여, 그것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거나 그것을 모방하여 현재 상태의 예술을 쇄신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그런 의미에서 양자 모두, 반동적인 동시에 혁신적이다)." "여기서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전통'을 사후적으로 (다시) 구성하는 작업 그 자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통은 다시 해석되지 않으면 창조적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동시에 '전통'이 그 자체로서는 결코 '중심'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대에 '중심'이 부재함을 인정하고 '전통'의 (새로운) 해석=구성이 '투기=계획에 대한 감각'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전통'인가 '투기'인가 하는 양자택일 대신에 '전통'과 '투기'의 역설을 역설로서 긍정하고, '전통'과 '투기' 사이에 열려 있는 중심 없는 공간 속에 감히 머무르는 것이다."(33-7)


# 투기投企=계획에 대한 감각 : '투기=계획'이란 계속 생성하고 있는 실재적인 것의 관념적 싹이며, 이 싹은 '장래로부터의 단편'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투기=계획에 대한 감각'은 '발전적=전진적'인 '방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제1장 소유


"고전주의적 이론에 '고대인의 모방'이라는 이념이 있다. 그것은 규범이라 할 고대의 예술가를 모방하는 것이야말로, 후대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는 길이라는 의미이다. 에드워드 영은 '독창성'이라는 개념을 확산시킨 계기가 된 『독창적 작품에 대한 고찰』(1759)에서 이 '고대인의 모방'이라는 이념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고전주의적 이론에 의하면, 예술가가 의거해야 할 규범은 고대의 예술가 내부에 있다." "이러한 고전주의적 이론에 대하여 영은 오히려 타고난 것의 의의를 강조한다. 영에 의하면, '자기 자신이 소유한 것'이란, 비유적인 의미에서 토지, 즉 타고난 능력이다. '고대인의 모방'이라는 이념은 예술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소유한 것'을 '경작'하는 데서 멀어져, '학식'이라는 타자에게서 '차용해온 지식'에 만족하게 하는 결점이 있다. 이와 같이 영의 독창성 이론의 근간을 지탱하는 것은 '차용물─자기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대개념이다. '차용해온 지식'이란 바로 공유화된 그리스-라틴의 고전전 전통이다."(47-8)


"소유권과 예술의 관련성에 관한 유럽의 전통적 논의에서, 그 출발점을 이루는 것은 호라티우스의 『시학』이다. 그 한 구절은 18세기 중엽까지 효과를 유지했으며, 그것은 전통적 예술관에서 예술가 내지 작가가 하는 역할을 명백하게 진술한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사항을 최초로 제시하기보다는, 『일리아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는 편이 좋다. 공공적인 소재publica materies도 당신 자신의 것privati juris이 될 것이다.〉" "고대인의 '권위'에 따르는 한, 사람들은 '차용물의 풍부함' 내지 '수입품'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자기의 타고난 능력을 갈고 닦음으로써 스스로 작품을 생산할 필요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타고난 능력의 경작(즉 도야)이야말로 풍부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그때 처음으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예술가야말로, '권위'authority에서 자기를 해방하고 작품을 스스로 창조하는 '작가'author가 된다."(43, 48-9)


"독창성의 이론은, 개인의 정신적 개체성·유일성을 기초로 하여, 이러한 개인이 스스로 창출한 작품에 대하여 배타적 소유권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독창성의 이론을 격렬하게 비판한 괴테는 각각의 예술가를 고립된 자로 바꾼 독창성 이론을 예술가의 집합성으로 대치한다. 본래, 만약 '내'가 '나 자신의 내부에서 획득'한 것만이 '나의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나'라고 믿어버린 것 가운데서, 과연 어느 정도가 정말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타자에게서 얻은 것을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부정하고, 나 자신의 내부에서 얻은 것만을 '나'로 간주하는 일종의 순수주의도 하나의 방도일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타자에게서 얻은 것을 포함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항상 독창성에 관해 말하는데, 대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내가 위대한 선행자나 동시대인에게 빚진 것을 모두 병기한다면, 거기서부터 남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독창성 이념에 대한 비판은 전통의 복권과 결합한다."(67-8)


"독창성의 이론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면, 독창적인 예술작품이란 그것은 창출한 독창적인 예술가의 배타적 점유물, 양도 불가능한 사유물이 아니라, 선행하는 예술가와 후속하는 예술가에게로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지적 소유권의 옹호자가 의도에 반해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만약 티텔이 말했듯이 '정신적 소유권'이 〈영원히 나의 것이며, 또한 나의 것으로 계속 존재하여, 결코 타자의 것으로는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면, 본디 이러한 정신적 소유권은 '저작권' 등의 법제도를 통해서 옹호할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이라는 법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정신적 소유권이 어떤 정신적 소산을 '창출한 개성적이며 정신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법제도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는 사태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양도되지 않는 저자의 권리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저작권법이 제정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저작권법이 저자의 정신적 소유권을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다."(70-1)


"그러나 이상과 같이 말한다고 해서, '독창적인 저자'라는 것이 정신적 소유권을 둘러싼 법제도가 만든 단순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독창적인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 까닭은, 그것을 향수하고 해석하는 사람들─나아가서는 이 작품에 자극되어 창작하는 사람들─의 손에 위임되어 이른바 공공적인 것, 즉 공유물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유물은 '고대인의 모방'을 논하기 이전의 고전주의자들이 이해한 것과 같은 의미의 규범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죽어버린 사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술작품의 공공성이란, 그 작품의 해석이라는 개별적인 작업에 의해서만 성립하는 것이라서 단순히 '물품'으로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작품이 장수한다는 것은 그 예술작품이 매번 새로운 독창적 해석(혹은 창작)을 환기시킴으로써 스스로 변모하여 공유물이 되기 때문이다. 공유물은 독창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71-2)


제2장 선입견


"애디슨은 '인위적 취미'artificial taste와 '자연적 취미'natural taste를 대비한다. 〈인간의 자연 본성은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에서 동일하다. 그리고 인간의 자연 본성과 일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든 경우, 모든 신분의 독자들에게 칭송될 것이다.〉" "'자연적 취미'에 기초하는 작품은 〈통상적인 일반적 감각[상식]을 가진 독자〉라면 '경우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누구라도 향수할 수 있다. 애디슨에 의하면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등의 '장엄한 단순함'으로 충만된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보편적 가요 내지 민요' 또한 이 조건을 충족시킨다." "애디슨에 의하면, 고대에서 근대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인간의 자연 본성은 기교나 고상함refinement 속으로 숨어, ······ 결국에는 예의 바름 속에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지만, 그 원인은 '자연적 취미'에 기초한 작품을 '기교', '고상함', '예의 바름'이라는 근대의 인위적 이상으로 단죄하려 하는, 바로 근대인의 '선입견'에서 찾아야 한다."(79-80)


"데이비드 흄은 우선 취미의 기준을 부정하는 입장─모든 종류의 미와 추에 관해 흔히 사람들의 감정은 매우 다르다는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을 덧붙인다. 물론, '작문'이나 '시'가 따라야 할 '취미'의 '기초'를 (마치 '기하학적 진리'와 같이) '선험적인 추론'으로써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취미의 기준을 부정하는 논거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취미의 '기초'는 우리의 '경험'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모든 나라에서 모든 시대에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보편적으로 간주되어온 것[=이른바 고전적 문학작품]에 관한 일반적 고찰〉을 통해 우리는 '시'가 따라야 할 '기술의 규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규칙의 보편성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기술의 보편적 규칙 모두가 단지 경험에, 즉 인간의 자연 본성에 공통된 감정의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이와 같이 흄은 '인간의 자연 본성'에 공통성이 있다는 데 의거하여, 취미의 기준이 갖는 보편성에 근거를 부여한다."(84)


"버크는 '감관'과 '상상력'에 관계하는 '취미'를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다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수한 의미에서 취미라고 불리는 것'(즉 '판단력'이 관여하는 '취미')은 비자연주의적인 것이라고 논의를 전개한다." "버크에 의하면, 우리가 '사물의 지각가능한 성질'이나 (회화 속에) '정념'의 '묘사'를 지각하는 한에서, 그 쾌는 단지 '감관'과 '상상력'에 의거할 뿐이다. 그러한 한에서 우리의 '취미'는 '자연 본성적'으로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수많은 예술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것은 단지 '지각 가능한 대상'도 아니고, '정념'도 아니며, 사람들이 엮어 넣은 '도덕'적 세계이다. 이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바로 '감관'과 '상상력'을 초월한 '판단력'이다. 또한 '판단력'에 의한 판정은 판단력의 자연적 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반복된 훈련'을 통한 '이성적 추론의 습관'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버크는 이와 같은 훈련을 통한 '보다 세련된 판단력'이야말로 바로 '탁월한 의미에서 취미라 불리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91-2)


"버크는 취미가 '감관', '상상력', '판단력'이라는 삼자의 복합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취미의 '토대'가 '감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논함으로써 취미의 보편타당성을 주장한다." "애디슨, 흄, 버크의 이론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18세기 초부터 중반에 걸친 '취미론'은 자연주의적 취미론의 아포리아와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자연주의적으로 해소한다. 자연주의적 취미론을 지탱하는 것은, '개별'에는 '보편'이 자연 본성적으로 내재한다는 확신이며, 그 때문에 여기서는 '개별'과 '보편'이 무매개적=직접적으로 결부된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취미론은 동시에, 자연주의 입장에서는 부정될 수밖에 없는 '선입견'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선입견'이란 '개별'과 '보편'의 중간에서, 문화적, 역사적으로 상대적이며 다양한 모습을 취한다. 자연주의적 취미론은, 이러한 '특수'한 차원에 위치한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스스로의 근본적 전제 때문에 그것을 굳이 무시한다. 여기에 자연주의적 취미론의 아포리아가 있다."(93-4)


"레이놀즈는 『회화에 대한 강연』(1769~1790)의 제7강연에서 회화의 본질에 관계하는 '긍정적이며 실체적인 미'와, 회화의 비본질적인 측면에 관계하는 '장식'을 구별한다." "레이놀즈에 의하면 '장식'은 확실히 '일반적 원칙'에 기초하는 '긍정적이며 실체적인 미'에 비하면 비본질적이며 부차적인 '지위'를 점할 뿐이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장식'을 '무시'해도 좋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장식을 무시해야 한다고 하는 엄숙주의rigorism는 '자연과 이성'에, 즉 인간이 단지 원칙에 근거하는 이성적 존재일 뿐 아니라, 감성적 측면과도 결부된 존재라는 인간의 자연 본성에 위배된다. 레이놀즈는 '완전하고 전체적으로 완벽한 취미'를 '형성'하려면 '두 번째 종류의 진리'에 근거한 '장식'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논한다. 또한 그는 이 '두 번째의 진리'에 근거한 '장식'에서 '국민적 취미'를 변별하는 특징을 추구한다. 이제 '지역적'인 특징은 단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되어야 할 것으로 다시 파악된다."(99-100)


"즉 예술은 (반 다이크 초상화의) '의복'에 보이는 바와 같이 항상 '가변적 원리'와 관계하는 측면, 즉 '장식'적 측면도 가진다. 18세기 잉글랜드의 조상이나 초상화에 그리스·로마풍의 의복이나 17세기 전반에 반 다이크가 그렸던 의복을 걸친다고 하는 사태는 '선입견', '통념'에 근거한 '두 번째 종류의 진리'에 관계하므로 '자의적'이며 변화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자유롭게 변경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두 번째의 측면은 이미 사실상 '권위'가 됨으로써 '진리로서 기능'하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권위'가 타당하다는 것은 일정한' 선입견'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구체적으로 어떤 일정한 '국민'(특히 그 엘리트층)─에게 한정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상상력'에서는, '선입견'에 근거하는 '습관'에는 본래의 '자의적'이며 '자연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것을 '자연적인' 것─즉 '제2의 자연'─으로 전환하는 힘이 있다. 여기서 '국민적 취미'가 성립하게 된다."(103-4)


제3장 국가


"루소의 사회계약은 (홉스와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계약자의 특수한 인격을 대신하여, 하나의 정신적 집합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개개인이 일반의지 아래 일치하여 사회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이미 '사회적 정신'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 '사회적 정신'이란 '사회계약'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할 것이다. 즉, 두 번째 문제는 원인이 소산(결과)을 전제로 하는 순환이다. 이 순환을 두고 루소가 제기하는 해결책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로 루소는 〈입법자는 ······ 논증하지 않더라도 설득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종교적] 권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라고 언급하며, '종교'의 권위에 호소한다. 두 번째로 루소는 〈이 지상에는 광채를 발하면서도 법률에 견디지 못했던 국민들이 많다. ······ 개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국민도 또한 그 청년기에만 순종적이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교정하기 힘들어진다. 일단 관습이 확립되고 선입견이 뿌리를 내리면, 그들을 개혁하려는 것은 위험하며 무익한 시도가 된다〉라고 주장한다."(120-1)


"'학문'과 '예술'이 사치나 허영심을 초래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추락시킨다고 비판한 것은 루소의 『학문예술론』이다. 칸트 역시 그러한 '해악'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학문'과 '예술'(혹은 '취미')을 단지 비판하기만 하는 것은, 거기에 작용하는 '자연의 목적'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예술'과 '학문'이 그 '해악'을 통해서 인간이 도덕성을 지니도록 '준비'하게 한다는 목적론적인 사태이다. 『인간론』의 말을 빌리자면, '취미'란 〈인간을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형성하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그러나 사회적 상황에서 타자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노력을 통해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준비한다.〉 『판단력 비판』 제83절에서, '예술'과 '학문'은 그것이 〈의지를 욕망의 폭군적인 지배력에서 해방한다〉라는 점에서 〈훈련(규율)에 의한 도야陶冶[문화]〉라고 말한다." "이처럼 칸트의 역사철학은 '문화'라는 시점에서 '취미' 내지는 '미적 판단'(이라는 '반성적 판단력'의 작용)을 그 구성에 포함한다."(127-8)


"'국가의 창설'도 '국가 연맹'의 확립도 다같이 '자연의 기계적 과정'에 속한다고 간주하여 루소의 '순환'을 부정하는 칸트와는 달리, 실러는 오히려 이 '순환'을 계승하여 미학적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실러가 보기에,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개개의 부분(즉 구성원)이 각각 자립적 전체성을 유지하면서 협동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그에 반해 근대의 국가는 개개의 구성원이 전체성을 상실하여 단순한 단편이 되고, 그것에 대응하여 전체로서 국가도 또한 유기성을 잃고 부분들의 기계적 결합이 된다." "'유기적 생명'을 갖지 않고 기계적 편제를 취하는 근대 국가에서, 근대적 인간은 전체에서 분리된 개인=고독한 인간이고 또한 이 고독한 개인은 자기의 전체적 조화를 결여한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응해서 근대 국가는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원과 구별되어, 개개의 구성원을 외적으로 지배하는 '추상적 존재'가 된다. 이렇게 부분과 전체가 서로 '소원'해지고 개인의 '도덕'과 국가의 '법'이 분리된다."(132-4)


"실러는 근대적 국가관과 대조적으로 국가이론의 내부에 '기계적-유기적'이라는 대개념對槪念을 도입한다." "〈국가가 개인들의 내면에 자기를 주장하는 방식은, (1)순수한 인간이 경험적 인간을 억압하여, 국가가 개인들을 지양할 것인가, 혹은 (2)개인이 국가가 되어, 시간 속의 인간이 이념 속의 인간으로 자신을 고귀하게 할 것인가이다.〉" "(1)과 (2) 둘 다 '이성의 법칙이 무조건적으로 타당하다'라는 점에는 공통한다. 그러나 (1)이 단지 인간의 이성적 조건만을 고려한 데 반해, (2)는 인간의 감성적 조건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다. (1)에서는 인간의 감성적 측면이 이성적 측면에 억압되고, 그것과 대응하여 개인이 국가에 억압된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2)에서는 인간의 감성적 다양성이 그 다양성을 유지한 채로 이성적 통일성과 조화하고, 그것과 대응하여 개개인은 자기의 독자성을 잃지 않고 국가 속에서 자신을 체현한다. 여기에 실러가 추구하는 유기적인 이상 국가가 성립한다."(135-7)


"프랑스혁명 시대에 실러는 〈내적 인간에게서 분열이 다시 지양되기까지는 어떠한 국가 변혁의 시도도 시기상조이다 ······ 라고 간주되어야 한다〉라고 언급하며 프랑스혁명 이후의 시대로 시선을 돌린다. 실러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정치상의 모든 개선은 [개인의] 성격을 고귀하게 만드는 데서 발생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조야한 국가체제의 영향 아래서는 성격이 고귀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격의 고귀화라는]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국가가 부여한 적이 없는 도구를 찾아내야 한다.〉 도대체 이 '국가가 부여한 적이 없는 도구'란 무엇인가? 실러는 '이 도구야말로 예술'이라고 단언한다." "이것은 실러와 칸트의 차이를 설명한다. '자연적'인 것이 도덕성의 실현을 외적으로 촉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 칸트에 반해, 실러는 '자연적'인 것은 〈사회의 유지보다는 오히려 사회의 파괴를 목적으로 한다〉라고 주장하고, 루소의 '순환'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미적 교육'에 의해서 해소하고자 한다."(140-2)


"감성적 욕구란 완전히 사적인 것이므로, 그것은 사람들을 통합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 반면, 이성적·정신적 원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얼핏 보면, 사람들을 통합하는 원리인 듯이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적인 것, 개인적인 것을 처음부터 배제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개인들은 이성적 원리에 의한 통합에 관여할 수 없으며, 그 통합은 추상성을 피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인간의 감성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의 조화를 초월론적 조건으로 하는 미의 향수에서는, 감성적 욕구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개인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이성적 원리에 기초하는 단순한 부류도 아니며, 개체적인 동시에 유적 존재, 즉 전체성을 담당한 개인이다. 그리고 미를 향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야말로 개개인의 다양한 독자성을 억압하지 않는 관계, '평등의 이상'이 성립한다. 실러는 취미를 통해서 자기의 개인적 감정을 보편적으로 서로 전달하는 사람들의 집합을 '미적 국가' 내지는 '미적 가상의 국가'라고 부른다."(149)


인테르메초 중심의 편재


# 인테르메초 :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대응하여 막간에 배치한 극을 지칭하며, 저자가 '중간 고찰'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노발리스는 『잡록집』 제122단장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온건한 정치 형태[즉 군주제와 민주제라는 양극의 중간에 위치하는 절충적 국가체제]는 반은 국가이고 반은 자연 상태이며, 인위적이고 지극히 부서지기 쉬운 기계Maschine〉이다. '기계'로서의 국가, 그것은 시민사회에서 다양한 이기적 욕구를 국가의 원리로써 조정하고자 하지만, 이것은 원칙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과제이다. '조야한 이기심'은 '전혀 헤아릴 수 없이 반反체계적'이며 '결코 제약되지 않는' 것이지만, '국가 체계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 이기심의 제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기계가 살아 있는 자율적 존재로 전환한다면, 큰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민주제의] 자연적 자의恣意와 [군주제의] 인위적 강제는 정신의 내부에서 해소될 때 서로 침투한다. 정신은 양자를 유동적으로 만든다. 정신은 항상 시적이다. 시적 국가야말로 진실로 완전한 국가이다.〉 여기서는 '기계'로서의 국가에서 '정신'으로서의 국가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160-1)


"『잡록집』 제122단장에서 보이는 '기계'와 '정신'의 대립은 『신앙과 사랑』에서 다시 '문자'와 '정신'의 대립으로도 묘사된다." "노발리스는 단지 추상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전도된' 것으로서 부정하면서, 국가의 근저에 존재하는 '헌법', '법률'이라는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인격 속에 구현될 필요성이 있음을 설명한다. 그는 추상적인 것과 그 구체적 상像과의 관계를 '이념'과 '상징'의 관계와 비교한다. 즉 노발리스에 의하면, 법률이라는, 그 자체로서는 완전히 추상물인 것을 구현한 (허구의) 국왕이야말로 사람들에게 법률에 대한 애착을 가능하게 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애착의 대상이 되는 국왕은 '상징'으로서 '신비한 군주'(이성적 국가 체제)를 지시하는 것이다." "이제 〈통치자는 무한하게 다양한 연극을 상영한다. 그곳에서는 무대와 객석, 배우와 관객이 하나가 된다.〉 국민은 정치적 통치가 구체적으로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통치자와 일체화하면서 이 정치적 통치에 참가한다."(162, 166-7)


"〈단지 몰沒정신적인 사람만이 (상징으로 간주되는 것의 제한이나 제약으로 인해) 부담이나 억제를 느낀다.〉 여기서 말하는 '제한과 제약'이란, 상징으로 간주되는 것의 피제약성(구체적으로는 실제의 국왕이 가지는 유한성)을 의미한다. 얼핏 보면, '상징'으로서 '인간' 그 자체의 가치가 중요한 듯이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이 단장의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상징'에 '자극'되어 '신비적 군주'를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여기서는 '정신'으로 불린다. 거꾸로 '정신'이 결여된 사람은 '상징'을 '상징'으로서, 즉 어떤 '이념'을 가리키는 '허구'로서 파악할 수 없고, 오히려 현실의 군주가 가진 피제약성에 의해서 억압당한다. 이와 같이 노발리스는 한편으로는 '상징' 군주제가 억압적으로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극'으로서 '상징'이 지니는 힘의 가능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단장 모음집 『신앙과 사랑』을 '수수께끼 언어' 속에 엮어 쓰는 것이다."(168)


"노발리스는 어떻게 이와 같은 '상징' 이론에 도달했을까? 이 의문에 답할 열쇠가 『잡록집』 제73단장 속에 있다. 〈진정한 종교성에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신과 연결하는 매개항[=중간항]Mittelglied이다. 인간은 직접적[=비매개적]으로는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노발리스는 먼저 종교의 본질적 구조로서 '인간-매개자-신'이라는 삼자관계를 제기한다." "노발리스에 의하면,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매개자로서 선택되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다. 〈이러한 선택들이 얼마나 서로 상대적인가? 사람들은 즉각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종교의 본질은 매개자의 성상性狀에 의존하지 않고 매개자에 관한 견해 속에, 매개자에 대한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이념에 도달할 것이다.〉 즉 종교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사람이 어느 대상을 매개자로서 파악함으로써 신과 관계하는 것이며, 그것과 비교한다면 매개자로 간주된 대상 그 자체의 특질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168-70)


"『잡록집』 제73단장의 종교론을 정치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는 '국민-매개자-국가'라는 삼자관계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어서, 매개자를 인정하지 않고 국민과 국가의 직접적 관계를 주장하는 입장도, 매개자를 그대로 국가와 등치하는 입장도 동시에 부정된다고." "그렇다면 정치에서 무엇이 '매개자'가 될 수 있을까? 『신앙과 사랑』의 단장 18에서 노발리스는 〈모든 인간은 왕좌에 앉을 수 있어야 한다sollen〉라고 말한다. 노발리스에 의하면 단지 한 사람의 군주만이 '국가의 매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국가의 매개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일신론과 정치적 범신론의 결합이 의미하는 바다. 확실히 군주가 국가의 '중심점'Mittelpunkt을 이루기는 하지만 '모든 인간'들도 또한 '중심점'에 위치할 수 있는 것이며 또 위치해야 한다. 세계는 '일자'一者에서 유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개체 속에 '일자'가 내재하며, 세계는 모든 곳에서 유출한다. 중심점은 편재하는 것이다."(173-5)


제4장 방위


"에티엔 콩디야크는 『인간 인식 기원론』 제2부 제1장 '언어의 기원과 진보에 관하여'에서,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라는 역사적 전개과정을 상정하고 이 역사적 과정을 두 시점으로 파악했다. 즉, 한쪽은 언어의 음악성과 생동성이라는 관점인데, 그것에 입각할 때 고대 언어 즉 동방 내지는 남방의 언어야말로 그 이상을 체현한 것이 되고, 북방의 언어는 쇠퇴 내지는 퇴락으로 간주된다. 다른 시점은, 언어의 정확성이라는 시점인데 그것에 입각할 때 북방의 언어인 근대 프랑스어야말로 그 이상을 체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콩디야크는 이중적 사고에 의해 이른바 신구논쟁에 관하여 일방적으로 고대인파 또는 근대인파의 입장에 서지 않고, 북방적 근대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를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북방적 근대는 인간에게서 상상력의 의의를 무시하고, 인간을 분석력이라는 시점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방과 남방의 새로운 종합이 요구되며,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어이다."(195-6)


"헤르더는 『셰익스피어론』(1773)에서 '그리스'와 '북방'(즉 잉글랜드)을 대비적으로 파악한다. 양자는 지리적 대립인 동시에 역사적 대립이기도 하다. 그가 이러한 대립을 제기한 까닭은, 그동안 사람들이 이 대립을 자각하지 못하여 '고전적' 척도로 셰익스피어를 읽고서 〈셰익스피어가 소코플레스, 에우리피데스, 코르네유, 볼테르와 같은 고전적인 비극시인이 아니〉라고 하여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미(美點)를 규칙 위반과 비교하는〉 것으로 셰익스피어를 '옹호'할 것인가 하는 둘 중 하나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택일 상황에 있는 한,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시점을 바꾸어', 셰익스피어를 고전적 연극과 다른 척도에 입각해서 평가하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그랬듯 남방적 원리에 기초해서 셰익스피어를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북방적 원리에 기초하여 〈셰익스피어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감수感受하는〉 것이 필요하다."(210)


"남방과 북방의 관계에 새로운 이론을 제기한 이들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초기 낭만주의자들이다. '남방 문학'과 '북방 문학'이라는 대개념을 제기한 슈타엘 부인은 〈우울, 즉 천재의 작품에 풍부하게 보이는 이 감정은, 거의 가 북방의 풍토에만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 우울한 시는 철학에 가장 적합한 시이다〉라고 썼다." "콩디야크도 북방을 철학적이라고 간주했는데, 그것은 철학이 분석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방적 기질을 '우울' 기질에서 찾는 슈타엘 부인에게서 북방은 철학과 결부되기는 하나 그 경우 철학은 보다 내성적이고 냉정한 분석력이 아니라, 오히려 정념의 강한 작용을 전제로 한다. 그 때문에 그는 〈사람들은 북방보다 남방 쪽이 정념이 격렬하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나에게는 오류로 느껴진다〉라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정념이란 신체적으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 정신적 정념이며, 그것은 북방에서만 생기기 때문이다."(215-7)


"A. W. 슐레겔이 보기에, 고전적 예술에서는 감성적 현상이 그 자체로 긍정된다. 고전적 예술은 '감성적인' 혹은 유한한 세계에서 인간의 '자연적 조화'가 표현된 것이란 점에서 완성의 범위에 도달해 있고, 고전적 인간은 이와 같은 예술에 의해 표현되는 감성적 세계를 초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고전적 시는 고전적 인간이 스스로 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소유'했던 조화로운 세계를 그대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바로 '소유의 시'이다. 그러나 근대정신은 감성적 세계에서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그리스적 이상을 '불가능하게 하는 내적 분열'을, 또 감성적 세계에서 현상하는 법이 없는 '무한한 것'을 의식한다." "즉 이러한 분열을 전제로 정신적 세계와 감성적 세계 사이에 고차적인 유화를 초래하려는 것에 근대 예술의 특질이 있다. 이 때문에 근대의 시는 '동경의 시'가 된다. 슐레겔이 고대의 '고전적' 예술과 대비해서 '낭만적'이라고 특징지은 것은 이와 같은 근대의 예술이다."(220-1)


# 유화宥和 : 상대편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사이좋게 지냄


"그렇지만 낭만적 예술은 서로 배타적이라는 의미에서 고전적 예술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낭만적 예술이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대립 및 유화 속에 성립한다는 것은, 유한한 것의 표현으로서 고전적 측면을 내부에 포함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낭만적인 것은 고전적인 것처럼 〈이종異種의 것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종적인 것'의 '뒤섞임'을 추구한다. 이것은 슐레겔에 의하면 원래 '낭만적'이라는 말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간취할 수 있다. 〈이 낭만적이라는 말은 로망스romance, 즉 라틴어와 옛 독일어 방언들이 뒤섞임으로써 성립된 민중어들을 나타내는 명칭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마치 근대의 교양이 북방에서 유래한 것과 고대의 단편이라는 이질적인 구성요소가 융합되어 성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에 비해, 고대인의 교양은 훨씬 단일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근대적 정신은 원래 상이한 요소로 이루어진 혼성물이고 그것을 표현한 것이 바로 낭만적 예술이다."(222)


"예전에 '북방'은 '고전주의'라는 이름 아래, 남방 예술의 '이식'을 도모하고, 자신을 무리하게 남방의 '식민지'로 변화시켰지만(빙켈만), 식민지 해방 전쟁에 승리한 '북방'은 '낭만주의'라는 명칭 아래 '토착의 것'을 중시하게 된다. 여기서 낭만주의의 확립과 함께 '방위'가 내포한 표상이 해체되는 과정을 간취할 수 있다. 첫째로 문학의 자생성, 토착성의 주장은 결코 북방적, 낭만적 문학을 특징짓는 것일 수 없으며, 그것은 남방 그리스 문학에도 똑같이 타당하다. 둘째로, 국민 문학이라는 이념은 동일한 북방 문학 내지 근대 문학 안에 국민성에 따른 차이를 초래한다. 남방적, 고전적 원리에서 자신을 해방한 '북방'의 예술은 오히려 국민 문학이라는 새로운 이념 아래 분산된다. 국민 국가의 진전과 함께 남북 내지 동서라는 풍토적 요인과 밀접하게 결부된 구분의 중요성이 상실되어가는 것이다. 물론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국민 문학이라는 이념이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225-6)


제5장 역사


"'체계'와 '역사'의 관계를 묻는 일, 이것은 역사철학의 과제일 것이다. 실러는 한편으로 칸트의 비판철학 구상을 계승하면서 '역사의 소재'인 역사적인 사실들과, '체계'인 '보편적 세계사' 내지 '보편사'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밝히려 했다." "이때 연속적 과정인 '세계의 추이'에 반해, (자료가 결여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 '세계사'는 '단편의 집합'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세계사'가 단지 '단편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학문의 명칭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러에 따르면 이러한' 결여'를 보충하고 '단편의 집합'에서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하며, 그것을 행하는 것이 '철학적 지성'이다. 〈철학적 지성은 이들 단편을 인공적인 결합의 고리로 연관시킴으로써 집합Aggregat을 체계System, 즉 이성적인 방식으로 관련된 하나의 전체로 고양한다.〉 여기서 '철학적 지성'의 작용은, 역사 속에 일종의 '가설'을 두고 그것을 통해 역사적인 여러 사상을 하나의 체계 내지 전체로 통합한다."(247-9)


"세계사를 어떤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할 때, 즉 개개의 사건을 체계로서의 세계사의 한 부분으로 파악할 때, 세계사를 파악하는 각 개인 또한 자기가 속하는 시대나 민족을 초월한 '인류'로 고양될 것이라고 실러는 주장한다. 즉, 실러의 역사철학은 고찰 대상인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고찰하는 주체인 개별을 보편과 연관시킨다. 이 이중의 연관이, 1789년 취임 강연에 나타난 실러의 역사철학을 지탱했다." "그런데 보불전쟁Napoleonic War의 패배를 눈앞에 두고 쓰인 미완의 산문시 『독일의 위대함』(1797 혹은 1801)은 1789년의 그것에서 미묘하게 벗어나 있다." "『독일의 위대함』의 특징은 본래는 '개인'을 '인류'로 고양하여 연결해야 할 '세계사'에 '특수'로서, '국민'이 이른바 불쑥 끼어들고, 이 '특수'가 그 특수성에서가 아니라 '보편적 가치'의 담당자 내지 대표로서만 평가되어 정당화되었다는 점이다. 즉 '세계사'란 하나의 보편성을 겨루는 다양한 특수가 분쟁하는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251-5)


"이와 같이 실러는 미학에 '역사적' 사고를 도입하더라도, 있어야 할 예술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즉 실러가 주제화한 '특수'란 보편적 가치의 담당자로서 특수이며, 이 '특수'는 보편적 가치 그 자체의 역사성을 이루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완전히 똑같은 시기에 예술의 이론이 예술의 역사와 불가분하게 관계한다는 주장이 슐레겔 형제에 의해서 제기된다. '역사적' 사고가 미학의 중추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동생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문학사 구상을 가장 빠른 단계로, 동시에 총괄적으로 나타낸 것은 그가 1800년에 출판한 『문학에 관한 대화』이다. 이 논고는 7인의 대화 형식으로 쓰였는데 그중에서 안드레아스가 행한 강의, '문학의 시대들에 관해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술의 학문은 예술의 역사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결코 비역사적으로 답할 수 없고 단지 문학의 역사를 통해서만 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256-7)


"그렇다면 철학과 역사라는 얼핏 보기에 이질적인 요소를 서로 연관시켜 보편타당한 것과 특수한 것의 혼합을 사고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슐레겔은 여기서 '비평'의 역할을 발견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그가 1804년에 공개한 일련의 레싱론이 시사적이다. 〈비평이란, 역사와 철학의 중간항이며, 그것은 양자를 결부하여 양자를 새로이 제3의 것으로 통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역사와 철학의 중간항'인 '비평'이 하는 일은 어떤 사항의 '특성 묘사'이며, 그것은 그 사항의 역사적 전개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하나의 개념으로 포괄하는 것, 혹은 반대로 이 개념에서 출발해서 그것을 역사적 생성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념'이란 결코 무시간적인 추상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것에 고유한 '내적 역사'를 가지는 것으로, 이 결합을 표면화할 때 역사와 철학의 결합으로서 '비평'이 성립한다고 슐레겔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문학사도 또한 본질적으로 '비평'으로서만 가능해진다."(259-60)


"슐레겔에게 전체[역사]와 부분 간의 상호적 관계는 역사적 과정에서 만들어져야 할 것으로서 파악된다. 전체와 부분 간의 상호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그것은 그가 말하는 의미에서 '비평'에 다름없다─은 현존하는 불완전한 전체에서, 있어야 할 완전한 전체를 상상함과 동시에, 이 있어야 할 전체를 선취하여 그에 어울리는 부분을 만들어낸다는 두 가지 계기를 불가분한 것으로 포함한다." "과거가 우리에게 '단편'으로만 부여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과거에 보완적으로 관계할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과거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우리가 '단편'으로 부여되어 있는 과거를 '메움'으로써 비로소 실현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보완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 과거의 작품에 관계되는 비평과, 미래의 있어야 할 작품에 관계되는 비평은 뜻을 같이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발견'과 '미래의 구상'은 일체를 이룬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비평'은 '예견적'이다."(262-4)


에필로그 중심의 비판


"빌헬름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1908)에 입각하여 종래의 미학 이론─테오도어 립스의 심리학적 미학─이 예술에서 유일한 원리로 간주했던 '감정이입' 충동에 대해서, 그와 다른 한 원리로서 '추상' 충동을 대치했다. 그는 이러한 미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그리스·로마 및 서양 근대'의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간주하는 '감정이입'형의 고전주의적 예술관─즉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유럽 중심주의적'인 예술관─에 반론을 제기하고, '추상' 충동에 기초한 예술, 구체적으로는 고대 이집트나 중세 고딕 예술을 심리학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했다. 이와 깉이 그의 양식심리학적인 미학 이론은 과거의 예술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라는 예술사·미술사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그의 이 책은 거의 우연에 가까운 경위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어, 당시 최신 예술운동이었던 추상회화 혹은 표현주의 예술을 담당하던 사람들('뮌헨분리파' 혹은 '청기사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다."(283)


"보링거는 이런 동시대의 예술가·예술운동에 촉구되어 1910년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현대 예술(특히 표현주의 운동)의 이론화를 시도했다. 거기서, 현대 예술에 관한 관심이 예술사 연구와 결부되고, 나아가서는 과거 예술의 의의에 관한 미학적 이론을 변모시키는 과정을 읽어낼 수 있다. 고딕과 표현주의의 만남이 초래한 것은 예술에서 '게르만적인 것=독일적인 것'의 찬양이었다. 그런데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에 걸쳐서 표현주의 운동이 쇠퇴하자, 그것에 호응하는 형태로 그의 미학적·예술사적 이론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고딕을 '게르만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자신의 기본적 입장을 부정하고, 오히려 고딕의 프랑스성性을 예술사적인 연관성 속에서 정당화한다. 이것은 그 자신이 고전주의로 회귀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표현주의는 오히려 비유럽적인 것으로, 즉 독일인이 자신의 유럽성을 망각한 데서 생겨난 오류라고 비판적으로 파악하게 된다."(283-4)


"보링거에게 이론이란,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적으로 다시 부여된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용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그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스스로가 사용하는 개념 그 자체를 역사 현상과의 상호응답을 통해서 다시 단련하는 것, 즉 개념의 비판적인 형성이었다." "어떠한 미학사 연구도 동시에 미학사 비판일 수 있다. 즉 그것은 현재 부여되어 있는 (다양한) 미학사 기술을 재고하고, 이른바 이러한 미학적 기술에 의해 지워진 다른 (다양한) 미학사를 간파하고, 그렇게 해서 미학사를 다시 기술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시선을 단순히 과거로 향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예술현상을 기술하기 위해 현재 사용되는 다양한 미학적 개념을 그 성립 과정에 조응하여 음미하면서 이러한 개념이 현재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상대화하고, 그것을 통해서 이러한 개념의 의미 내용을 이른바 장래를 향해 비판적으로 형성하는 (혹은 재형성하는) 것이다."(319-20)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