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책의 두께에 트라우마 연구의 결실이 담겨있다. “트라우마”라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지칭하는 용어가 없는 시절, 보훈 병원에서 일하던 저자는 베트남 전쟁 참전군인 빌을 만나며 기존에 존재하는 병과 다른 증상을 발견하고 평생을 바친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
저자는 자신이 만난 환자들의 사례를 들며 트라우마를 겪을 때 우리의 뇌 작용이 바뀌고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말한다. 아주 작은 단서만으로 과거가 재현되며 현재의 일과는 멀어지면서 멍해지기도 하고 격분하기도 한다. 몸의 화학작용으로 스스로 내면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트라우마는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사적 영역으로 여겨지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가정폭력, 성폭력 또한 원인이 된다. 트라우마 자체가 살면서 겪는 사건에서 비롯되기에 개인의 병이 아닌 사회의 아픔이 드러나는 병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정신질환 치료에 약물치료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트라우마는 다양한 치료를 통해 회복해야 한다. 약물은 몸을 치유할 수 있지만 아픔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치유만 가능하다.
.
다양한 치료법이 제시되었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게 집단치료, 언어로 경험을 말하는 것이었다. 침묵보다는 말로 누군가에게 내뱉으면 해소되는 것이다. 언뜻 쉬운 일 같지만, 언어는 한계가 있다. 끔찍했던 일을 이야기하기 위해 들을 만한 단어를 고르는 일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트라우마를 겪는 환자가 오히려 듣는 사람을 위해 생략하거나 돌려서 말하게 된다. 그렇지만 말런테스는 오히려 진실을 이야기하여 그 감정을 공유해야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힘든 일은 듣는이를 배려해서 말하기 어려워지는데 말을 하면 힘든 게 사라진다니.. 딜레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원천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P40
집에서 전쟁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많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300만 명의 어린이가 아동학대 희생자 또는 방치된 아이로 보고된다.- P56
단순히 도망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동물이나 사람이 자유를 찾아가지는 않는다. ...
위험이 따를지도 모르는 새로운 방법을 택하는 대신 익숙한 두려움에 갇혀 있으려 하는 것이다. - P71
감정이 이성의 반대 개념이 아님을 강조하려고 한다. 우리의 감정은 경험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 가치는 이성의 토대가 된다. 자기 경험은 이성적 뇌와 정서적 뇌의 균형에서 나오는 결과물이다. - P124
트라우마는 오래전에 일어난 어떤 일을 이야기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 일을 겪는 동안 각인된 감정과 신체 감각은 기억이 아니라 현시점에 나타나는 와해된 신체 반응으로 경험한다. - P355
우리는 침묵을 유지하면 슬픔과 공포, 수치심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름을 부여해야 또 다른 통제 가능성이 생긴다. - P402
나도 트라우마를 정치와 분리하고 싶지만 지금처럼 근본 원인은 무시한 채 트라우마를 거부하고 치료하려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P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