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나 유쾌했는지! 마치 대기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가을에 읽고 싶은 책 중에 하나는 댈러웨이 부인이다. 가을에 목마를 타고 가버린 숙녀의 영원한 여주인공 버지니아 울프의 자화상격인 댈러웨이 부인의 가녀린 어깨 위로 가을 햇살이 비추일 즈음이 요맘때가 아닌가? 댈러웨이는 어쩌다보니 몇 번이나 읽게 된 소설 중 하나이다. 몇 년에 한번씩은 읽게 되는데, 그때마다 클라리사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매번 진화한다. 누군가 나보고 클라리사와 닮았다고 해서도 있고, 사실 클라리사는 마치 나의 사유하는 방식이 닮았다. (그렇다고 내가 너무 속물일 거라고 속단하시진 말길) 그래서 클라리사는 여러 소설의 여주인공중에서도 애정을 가지는 캐릭터이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얼마나 신선하고, 얼마나 고요했던지. 물론 오늘 아침보다도 더 조용했었다. 파도의 찰싹임처럼, 파도의 입맞춤처럼, 싸늘하고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 당시 열여덟 살이던 소녀에게는 엄숙했다. 거기 그렇게 열린 창문 앞에 서 있노라면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꽃들과, 나무들과, 나무들을 감돌아 지나가는 연기와, 갈까마귀들이 날아오르고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노라면. 그때 피터 월시가 물었다

나도 복잡한 내가 싫지만, 잠깐 동안에도 수없이 변하는 나의 자아가 어떤때는 세이렌처럼 요상스럽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처럼 자꾸 변하는 그녀의 의식이 나와 닮았다. 지금 시작한 어떤 생각의 꼬리는 어디에서 끝날지 알길이 없다. 가끔 그런 나의 어떤면에 대해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철학적인 베이스가 깊이 깔린 작가의 해석이 나를 안심시켰다고나 할까
(사실, 나는 매우 독립적인 성격이고 누굴 따라하는 걸 싫어한다. 그런 점도 울프를 닮았을 터. 그래서 책읽기 책은 거의 읽은 바다 없다. 하지만 우연히 알게된 카프카와 릴케를 읽은 후 작가의 팬이 되었다. 내가 읽은 책과 작가가 읽은 책이 다른 듯 같은데 그걸 찾는 묘미라고나 할까. 나는 감성적이면서도 끝까지 이성적이길 포기하질 않는 타입인데, 작가의 문체도 그렇다. 작가의 문체가 무척이나 맘에 든다. 이성적으로 건조하게 밀어붙이는 듯한 문체에 가끔씩 섞이는 부드러운 인간애 넘치고 유쾌한 몇몇 문체. 작가의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지만 논픽션에도 이런 문체가 있다니 주목할 만한 작가란 생각이 든다. 물론 앞으로도 김운하 작가의 책에는 애정을 가질 터가 분명하다 )
사실, 스무살에 처음 댈러웨이 부인을 접했을 땐 난감했다. 속내와 실제 말, 현재와 과거, 클라리사와 수많은 캐릭터들이 예고없이 뒤섞여 나오는 소설. 소위 의식의 흐름 기법이란게 쉽지 않을뿐더러, 젊은 혈기의 나로서는 그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새벽두시 페소아...이책을 읽고서야 그 의식의 흐름기법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클라리사의 의식의 흐름에 대한 설명은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이해를 한층 높인다. 비슷한 사람은 좋아하기도 하지만, 융의 그림자이론처럼 닮았기에 싫어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나도 댈러웨이를 거부감을 갖고 읽었던 듯하다.

“의식의 흐름은 마치 바람이 잔뜩 든 풍선을 손에서 놓아 버렸을 때, 그것이 멋대로 허공을 휘돌아 어디에 떨어질지 결코 알 수 없는 것처럼 ,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를 거쳐 어디서 끝날지 의식자신도 결코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바람이 빠지는 풍선의 궤적이 풍선에 든 바람과 외부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 따라 결정되듯이.
..
의식은 그 자체가 무의식의 상연 무대이자 동시에 어떤 사고를 연출하는 주연배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표면적 의식과 반성적 의식의 분열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의식 자체의 분열상이다“
작가가 명명하길 “나-뇌의 딜레마”. 이런거 없는 현대인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걸 문학으로 표현한 버지니아가 다시 한번 위대한듯하다. 나의 갖가지 상념들은 결국 내적인 자극과 외적이 자극이 결합해내는 신비다. 겉으로 보여지는 나의 삶과 속에서 익어가는 또다른 나의 분열사이에서 나는 방황하지만 어찌됐건 나는 삶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나를 미소짓게 했다. 아마 나처럼 잡념많은 여인들은 작가의 문장에 마음이 놓일 것이다. (그토록 몇 번이나 읽었는데도 나는 왜 그 생각은 못한거지? 또한 나는 몇 번을 읽어도 1923년 6월 23일 이라는 날짜는 찾지 못했는데...흠. 작가님 도대체 그게 어디 나와요???? 역시, 작가는 작가인가부다)

새벽두시에 이 책을 읽으며 괜시리 뭉클했다. 나와는 다른 작가가 골라준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들. 작가는 말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사물들과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 안에서 함께 살고 있음을 느낀다라고. 그런 세상은 살만하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사랑하고, 어떻게 그런 관점으로 인생을 보고, 여전히 꿈을 꾸는 걸까?
“어쩜 이리 화창하지! 바깥으로 뛰어들고 싶어”
작가가 두 번이나 인용한 문장을 나도 다시 인용해본다. 세익스피어의 작품 “심벨린” 4막2장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더 이상 두려워 마라, 태양의 뜨거움을,
또한 광폭한 겨울의 사나움을“
작가의 말을 다시 인용해본다.
1923년 6월 23일의 하루, 이 하루는 사실 평범한 하루다. 파티라는 행사를 제외하면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무수한 하루들과 별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이 하루는 과거의 하루들과는 다른 하루다. “일상에 파묻혀 자기자신을 잃으며 살아가는” 그런 하루와는 또 다른 하루다.
그녀가 자신과 주변의 삶과 존재를 돌아보고 회상하면서 자신이 지금 무엇을 잃어버리고 잇는지, 삶에서 진정으로 지켜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면서, 온 영혼으로 이 하루를 느끼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존재들과 내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고, 그 통일성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기쁨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말대로, 오늘은 나를 잃으며 살아가는 하루가 아니다. 시간 루프에 갇혀 닿지 않는 시간의 일부도 아니다. 세계와 내가, 외적자극과 내적자극이 깊이 연결해 통일성을 이루며 나의 세계를 이룬 하루다. 이런 하루가 감사하다. 그리고 그런 통찰력을 보여준 작가의 도움에 감사하는 하루다. 땡큐,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