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그즈음, 서윤의 하루는 보이지 않는 예감과 긴장 속에 놓여 있었다. 대학 동기 은영의 결혼식이 있었던 그날이었다. 밤이 되어 지친 몸을 이끌고 대문을 지나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 평소와 달리 공기 속에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늘 어둑하던 현관 앞 전등은 환하게 켜져 있었고, 정원에 있는 석등에도 오랜만에 작은 불빛이 반짝였다. 집 안에서는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다.


‘손님이 오셨나 보네.’


별다른 생각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한 발 들어선 순간, 반듯하게 정돈된 남성용 구두 한 켤레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광택이 흐르는 가죽, 고급스럽게 정제된 실루엣. 몸속으로 미세한 전류가 흘러내렸다. 그녀 주위에서 그런 구두를 신는 사람은 오직 한 명, 태일뿐이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 여기여야 하는가. 가족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그를 마주해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등줄기를 따라 냉기가 번졌다.


현관 안쪽과 거실 한편에는 선물 꾸러미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하나같이 이름난 백화점이나 명품 브랜드의 마크가 선명했다. 태일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려고 수행원들까지 대동해 들여놓은 게 분명했다.

 

-어머, 우리 아가씨 오셨네. 오늘 많이 더웠죠?


자리에서 일어서던 올케 옆으로 그의 얼굴이 스쳤다.


-이제 왔어? 좀 늦었네.


태일은 서윤을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일어설 듯 허리를 들썩였으나, 곧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적당한 환대와 적당한 무시가 섞인 그의 표정과 몸짓. 그런 형식적인 태도는 이제 서윤에게 지겨울 만큼 익숙했다.


거실 중앙에는 명절 때나 꺼내 쓰는 자개 상이 펼쳐져 있었고, 태일은 가족들과 둘러앉아 어색한 자세로 밥을 먹는 중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서윤은 묘한 이질감과 경계심을 느꼈다. 그는 한 끼 식사에 수십만 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는 시금치 된장국과 밥, 김치, 파래김, 콩나물무침, 멸치조림, 녹두 빈대떡, 그리고 맥주병과 막걸리 주전자가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평소 화려한 생활에 익숙한 태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이 상황이 집안의 초라한 살림살이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 같아, 서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민망했다.


태일은 오늘 방문에 대해 상의는커녕 언질조차 없었다. 지금껏 장래 처가가 될 이 집에 발을 디딘 것도 고작 두 번뿐이었다. 한 번은 서윤의 부모에게 처음 인사를 드리러 왔을 때, 다른 한 번은 약혼식이 끝난 뒤 그녀를 바래다주며 커피 한 잔을 마셨을 때였다. 그마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런 남자가 지금, 가족들 틈에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현실보다 낯선 기시감을 불러일으켰고,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릴 만큼 불길하게 느껴졌다. 마치 무뢰한 침입자가 그녀의 일상 한복판에 버티고 서 있는 듯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태일 씨는 여기 왜…

-예비 사위가 처갓집에 온 게 뭐 어때서. 이렇게 얼굴 보고 좋잖아. 안 그래요, 매제님?


오빠는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태일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큰 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아버지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며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아이, 오빠 벌써 취했나 보다. 그렇죠, 아가씨?


그 순간, 올케의 시선이 서윤이 메고 있는 가방에서 멈췄다. 은색 샤넬 로고를 훑는 그녀의 눈빛에 부러움과 질시가 뒤섞인 욕망의 그림자가 스쳤다. 늦은 나이에 능력 없는 오빠와 결혼해 시댁에 드나들며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는 올케에게, 중고차 한 대 값에 맞먹는 그 가방은 한 무더기 돈다발로 빚어낸 신기루처럼 보였을 것이다. 친구 결혼식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등장할 이유조차 없는 가방이었다. 서윤은 괜한 일로 올케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일찍 좀 다녀라. 우리 매제님이 아까부터 와서 기다렸잖아.


오빠의 얼굴에는 벌써 술기운이 잔뜩 올라 있었다. 눈빛은 흐릿하고 혀도 반쯤 풀려 있었다. 가족의 너절한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 자리는 서윤에게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일깨웠다. 신용불량자가 된 뒤 오빠는 몇 해째 무기력한 한량처럼 살아왔다. 반면 태일은 삶의 최우선 가치를 능력과 성과, 연봉과 직급에 두었다. 그런 태일과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오빠가 ‘처남’, ‘매제’ 하며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서윤은 숨이 막힐 듯한 위화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대로 돌아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왜 그러고 섰어? 저녁 안 먹었지? 어서 와서 너도 먹어라.


아버지가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아버지 앞에는 아직 입도 대지 않은 술잔이 놓여 있었다. 요즘 그녀의 마음은 온통 도준에게 쏠려 있었다. 오늘도 오후 늦게 대학로 근처에서 만나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진 터였다. 그렇다고 술에 취한 오빠와 태일을 남겨 둔 채 자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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