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난 또 뭐라고.
수경은 난간을 짚고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남편은 십여 년 전 미국으로 떠난 뒤,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사실상 별거 중인 부부였다. 수경의 남자 애인이 주기적으로 바뀐다는 소문은, 이곳 사람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근데, 아까 그 남자. 꽤 괜찮지 않았어?
-네? 그게 무슨…
서윤은 작게 헛기침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수경는 미묘한 표정으로 서윤의 몸을 훑어내렸다. 젊고 단정한 얼굴, 고운 머리칼, 날렵한 몸매. 수경의 시선에는 얄궂은 호기심과, 은근한 질투가 뒤섞여 있었다.
-꽁지머리 그 남자. 뭔가 느낌이 다르잖아?
-아, 전 잘 못 봤어요.
수경이 작품 감상을 하다 말고 여기로 온 것은 서윤 때문이 아니었다. 훤칠하고 이국적인 외모, 묘하게 낭만을 풍기는 분위기. 그 낯선 남자를 본 순간, 수경은 어쩔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이곳까지 따라 나온 듯했다.
-그런데, 뭐 도와드릴까요?
-아참, 태일이 온다고 했잖아. 근데 벌써 왔나 봐. 어머, 저기 꽁지머리도 있네.
수경이 건물 현관에서 주차장 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간 층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 층계를 내려오는 도준과 그를 향해 맞서 올라오는 태일의 모습이 보였다.
값비싼 올무를 손에 쥔 채 그녀를 옭아매러 오는 남자와, 순수한 열정으로 그녀 곁을 찾았던 한 남자가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겹쳐졌다. 그 장면은 두 세계의 충돌을 상징하는 듯했고, 늘 불행한 패만 골라 들었던 피노키오의 손끝을 떠올리게도 했다. 마치 시간과 선택의 틈 사이에서, 운명의 여신이 잔혹하게 그녀의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도준을 이대로 떠나보낼 것인가. 아니면 기꺼이 태일의 치명적인 덫에 나를 내어줄 것인가.’
수경은 층계를 올라오는 태일을 보며 리온과의 또 한 번의 은밀한 미술품 거래를 떠올렸고, 서윤은 층계를 내려가는 도준을 바라보며, 자신이 갈망하던 생의 열정이 점점 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두 남자가 같은 층계 위에서 스치듯 엇갈렸다. 찰나의 눈 맞춤이 오간 그 순간, 무심한 듯 서로를 확인하는 시선 속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태일이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먼저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예요?
그때, 최희숙 관장이 다가와 두 여자가 시선을 모으고 있는 층계를 함께 내려다보았다.
-제 동생이에요. 강 실장이 도착했어요. 저기 보이시죠?
수경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 그러네요. 강태일 실장님이 리온 갤러리를 다시 찾아주시고, 황송할 따름이에요.
-약혼녀가 다니는 직장이잖아요.
-맞아요. 저희 갤러리의 인재를 뉴욕에서 돌아오자마자 강태일 실장님이 싹 낚아채신 거죠. 호호호... 안 그래요, 서윤 씨?
관장이 옆을 돌아보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서윤은 보이지 않았다.
‘띵’ 하는 신호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서윤은 주저하지 않고, 재빨리 그 안으로 올라탔다. 지난봄, 횡계의 숲길. 그때 갈아타지 못한 운명의 마차에 뛰어오르듯,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한 발을 내딛듯.
-어머, 서윤 씨! 어디 가는 거야?
수경의 목소리가 호들갑스럽게 공기 중에 부서졌다.
-저기, 잠깐만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어요.
서윤이 소리치듯 말했다.
그때 화장실에서 나온 아이가 식수대 쪽으로 걸어가며 서윤의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서윤은 그 시선에 반응하지 않으려 애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철부지 피노키오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험의 길을 떠날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수경과 관장은 당황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급한 일이라뇨? 무슨 일이죠?
-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람.
관장은 입을 앙다물며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서윤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멈춤 없이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층 번호가 한 칸씩 내려갈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손바닥에 전류가 흐르는 듯 짜릿한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태일이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 피노키오 전시관 로비에 도착했을 때, 서윤은 이미 지하 1층 비상구를 통해 연기처럼 건물을 빠져나간 뒤였다.
-조금만 기다려요. 이번엔 내가 찾아갈게요.
서윤은 건물 사이 좁은 골목길을 내달리며, 자신을 격려하듯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처럼, 그 간절한 염원이 그녀의 숨결 속에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