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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전혀 다른 시간의 문이 열리고는 한다. 그녀에게는 지난 3개월의 공백이 그저 허무한 세월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짧았던 만남과 아쉬운 이별, 그리고 세상의 가장자리 어딘가로 사라졌던 그가 잠시 멈춰 있던 시간의 틈새를 헤집고, 다시금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횡계에서 태일의 차를 타고 떠나가던 그날, 묵묵히 정면만 응시하던 눈빛 그대로, 그가 시선을 마주하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뒤, 살며시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 손짓과 미소 사이, 숨이 멎을 듯한 전율이 온몸에 퍼졌다.


사방에서 지켜보는 눈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가능한 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버텼다. 그때 그녀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휴대용 스피커에서 잔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의 시선과 관람객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그녀에게 쏠렸다. 진열장 앞에서 여러 국가에서 출간된 피노키오 서적을 살펴보던 관장과 수경도 고개를 들어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의 불필요한 시선도, 한 마디의 추측도 용납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어떤 추문이나 오해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가 들려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 말을 이어가려고 애썼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소음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세상의 언어가 잠시 숨을 멈춘 듯, 오직 내면의 기억과 감각만이 선명했다.


3월의 횡계 숲길, 자전거 위에서 느끼던 바람과 햇살, 그의 웃음과 따스한 눈빛, 그리고 목요일 오후, 달콤하게 스며들던 입맞춤까지. 그날의 여운과 닿지 못한 사연들이 만화경처럼 눈앞에 맴돌다 잘게 부서진 파편이 되어 하나씩 가슴속으로 쏟아졌다. 서윤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노영미 연구원이 평소와 다른 서윤의 기색을 감지한 듯 재빨리 다가왔다.


-선배,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 보이세요. 괜찮으세요?

-아냐. 그냥, 잠깐 현기증이 났을 뿐이야.


서윤은 도준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우리 잠깐 쉴까요? 어때요?


최 관장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며 제안했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노영미가 맞장구쳤고, 최 관장이 재판관처럼 큰 목소리로 휴식을 선언했다.


-15분 정도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관람객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교사들의 인솔에 따라 두 그룹으로 나뉘어 휴게실 쪽으로 향했다.


-피노키오 전시관에서 가장 값비싼 작품이 뭔지 보여드릴게요. 이쪽이에요.


관장은 환심을 사려는 듯, 전시장 가장 안쪽에 있는 진열장으로 수경을 안내했다. 전시장 안은 사람들의 발길과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도준은 뿌리 깊은 고목처럼 거기 우뚝 선 채, 오직 서윤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봄, 마지막 이별의 순간. 그날도 그는 랜드로버 안에서 태일의 차를 타고 멀어지던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무엇을 택하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시간 속 한가운데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기다리는 자’였다.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가도 미동조차 하지 않을 듯했다.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귀에 걸고 있던 마이크를 벗어놓고, 옆구리에 찬 휴대용 스피커도 내려놓았다. 아무런 계획도, 명분도 없었다. 그런데도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움직였다. 또각또각 울리는 구둣발 사이로 주변의 시선들이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등 뒤에서 따라오고 있을지도 모를 수경의 눈길이 의식되자 내딛는 걸음마다 미묘하게 균형을 잃은 듯한 어색함이 스며들었다. 우두커니 장승처럼 서 있는 도준 앞에 거의 다다른 순간 서윤의 구두코가 우측으로 살짝 방향을 틀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스치듯 지나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보고 싶었소. 아주 많이.


도준의 목소리에는 작지만 단단한 울림이 배어 있었다. 서윤의 표정이 무심한 듯 싸늘하게 굳었다. 마음속에서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휘몰아쳤지만, 장차 시누이가 될 여자의 시선을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어떤 감정도, 어떤 표현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다. 거짓의 얼굴은 진실을 가장 정교하게 감춘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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