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로체 남벽’이라는 이름은 오래된 상처를 불러왔다. 1989년 가을, 모두의 심장에 새겨진 그날의 기억. 민혁은 그곳에서 추락해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도준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무언의 언어로, 그가 견뎌온 시간의 무게를 드러냈다. 민혁을 떠나보낸 슬픔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상실을 넘어서리라 다짐했다. 다시 마주할 그 벽을 향해, 어느 때보다 단단한 결심이 서 있었다.
노르부는 에베레스트 길목, 쿰중 마을에서 태어난 셰르파였다. 산과 더불어 성장하며 날씨와 지형, 고소에 대한 감각을 몸으로 익혔고, 청소년기에는 라마 사원에서 수행하며 심신을 단련했다.
이후 네팔 산악협회에서 정식 훈련을 받고, 수많은 원정대와 함께 히말라야를 누비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에베레스트만 해도 열 번을 넘게 오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고산 환경에 적합한 유전적 특성과 반복된 8천 미터급 등반 경험으로, 일반 등반가보다 훨씬 빠르게 고도에 적응하고 극심한 저산소 환경에서도 오래 버틸 수 있는 몸이었다.
지금은 파트너와 함께 여행사를 운영하지만, 기회가 닿으면 늘 고산으로 향했다. 산은 여전히 그에게 끝나지 않은 과업이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로체 남벽은 악마의 벽이야. 왜 또 거길 오르겠다는 거지?
-혼자 해볼 거야.
-혼자서? …미쳤군.
도준은 고개를 돌렸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돌았어?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안 돼, 절대로!
노르부는 도준 앞에 놓여 있던 맥주잔을 빼앗듯 자기 앞으로 옮겼다.
-노말 루트라면 모르지. 히말라야의 전통적 원정 방식, 셰르파, 쿡, 닥터, 원정대… 함께라면 기적처럼 가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 남벽은, 혼자라면 절대 안 돼.
-내년 봄이야. 작년 K2 하산 후 관광성 들어가 등반 허가 받았어.
-너희 같은 사람들,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노르부는 질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자꾸 위험하고 자극적인 것만 골라서 하려는 거야? 히말라야가 무슨 서바이벌 게임장인 줄 알아?
-그건 아니지. 그저…
-작년 에베레스트 참사, 기억나지? 하산길에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시신들이 눈 속에, 길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어.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지. 아, 왜들 기어이 여기까지 와서 죽는 건데?
-노르부, 나도 알아. 객기와 오만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걸.
-그런데?
-나도 눈의 거처에 사는 시바 신이 두렵지. 거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허공의 끝이니까. 그래서 더 정직한 마음으로 그곳에 서려는 거야.
-무산소에 혼자라니, 백 퍼센트 자살 행위야. 그렇게 죽고 싶으면 차라리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돈도 안 들고, 고통도 덜해. 그게 훨씬 경제적이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야. 스폰서도 일부러 찾지 않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감당할 거야.
-뭐, 후원자도 없어? 등반 자금은 어디서 구할 건데?
-그동안 가진 것들, 이것저것 다 팔았어.
도준은 노르부 앞에 있던 자신의 술잔을 다시 가져와 맥주를 가득 채웠다. 그때, 주인 여자가 달밧을 담은 식판 두 개를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노르부는 이미 식욕을 잃은 듯,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민혁 때문이지? 그걸 못 잊고 미안해서, 마음에 맺혀서 그러는 거지? 그럼 그만둬. 부질없는 짓이야.
-오해 마. 아직 아무도 오르지 못했으니까, 내가 한번 오르려는 거야. 로체가 거기 있으니까, 그게 전부야.
도준은 맥주를 들이켜고 손등으로 거품을 닦았다. 알전구를 향해 달려드는 하루살이 떼가 소란스럽게 윙윙거렸다. 뜨거움을 좇는 그들의 본능처럼, 그도 불빛을 향해, 죽음을 향해 겁 없이 돌진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것이 스스로 택한 길이었고,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도준은 어두운 허공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친구여, 내가 거의 다 왔다. 거기 너무 춥지는 않은가?’
하얗게 솟은 히말라야 능선을 배경으로, 민혁의 환한 미소가 바람에 흔들리는 환영처럼 어른거렸다. 두 번째 도전은 처음과 다를 것이다.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기에, 그래서 더욱 걸음을 멈출 수 없다. 빛과 어둠, 생과 사가 뒤엉킨 순간에서도, 도준은 그 길이 끝나는 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피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