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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일본으로 떠나기 전, 도준은 오랜만에 사촌 형 집에 머물고 계신 고모부를 찾아뵈었다. 고모부는 환자용 침대에 누운 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드라마 『전원일기』 재방송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퇴원 전보다 표정은 훨씬 부드러워졌고, 건강도 눈에 띄게 회복되고 있었다. 평생 농사일에 그을린 얼굴은 서울에 온 후로 많이 밝아졌는데, 덕분에 세월의 자국처럼 도드라진 검버섯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서울 물이 좋긴 한가 보다. 그새 시골 땟국물이 쑥 빠진 것 같지 않니?


고모부는 리모컨으로 TV 볼륨을 낮추며 미소 지었다. 목소리엔 여전히 병치레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오래 묵은 삶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도준은 어깨에 메고 온 가방에서 서윤이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종합비타민제와 홍삼 캔디를 꺼내놓았다.


-이게 웬 거냐?

-윗집 살던 아주머니 아시죠? 그분 손녀가 고모부께 드리라며 가져왔어요.

-윗집 손녀가? 아이고, 고맙구먼.


고모부는 약병을 쥔 손끝을 미세하게 떨면서도, 오랫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 떨림은 단순한 고마움을 넘어선,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었다. 그 순간 도준은 오래전 윗집 마당에서 목격했던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열세 살의 어느 날, 그는 용천 계곡에서 주운 분홍신 한 짝을 들고 윗집을 찾았었다. 그날, 이해할 수 없는 장면 하나가 그의 삶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말해선 안 될 비밀이라는 감각만이 몸에 먼저 새겨졌을 뿐이었다.


전쟁 과부였던 윗집 아줌마는 고모와도 오랜 이웃이었다. 두 사람은 언니와 동생처럼 친하게 지내며 반찬 하나도 나누던 사이였다. 그런 이웃집 아줌마와 고모부의 관계는 소년에게 도무지 믿기 어려운 비밀이었다.


그는 차마 누구에게도 그날 일을 발설하지 못했다. 고모가 알게 되면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고, 그 은폐된 사건이 결국 비극으로 이어질까 몹시 불안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 비밀을 외면한 탓에 하루라도 빨리 기숙학교로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고모는 세상에 없고, 도준도 더는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숨겨온 고모부의 불편한 진실을 한 번쯤 살짝 건드려보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이 불쑥 일었다. 무덤까지 지고 갈 비밀이 아니라면, 고모를 대신해 그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모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그동안 비밀로 간직했던 거예요.

-비밀이라니? 그래서?

-옛날에, 윗집 아주머니 젊었을 때, 고모부가 그 집에서 나오는 걸 봤어요. 그 방에 두 분만 있었죠. 오랫동안.


순간 고모부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꿈틀거렸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고모부는 충격과 고뇌가 뒤섞인 눈빛으로 도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모도 그걸 알았니?

-아셨을까요?

-글쎄다.

-저는 아무 말 안 했어요. 곧바로 기숙학교로 들어갔잖아요.

-왜 숨겼니?

-고모가 슬퍼할까 봐서요.

-그랬구나. 고맙다.


고모부의 ‘고맙다’에는 여러 겹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비밀을 지키느라 힘들었던 도준의 침묵일까, 자신의 불륜이 고모에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일까. 도준은 쉽게 헤아릴 수 없었다.


-고모에게 미안한 생각은 없으세요?


도준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분은 단순한 이웃이 아니었지. 전의 심방리 뱀골. 거기가 우리 고향이야. 그분은 부잣집 셋째 딸, 나는 그 집안 소작농의 아들이었어. 그분이 시집을 갔고, 전쟁통에 홀몸이 되었지. 내가 횡계로 온 건 그분이 여기서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이야. 고모를 만난 건 그 이후였지. 두 여자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걸 안다. 더 잘해주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지.


고모부가 오래 묻어두었던 진실이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한 남자의 노쇠한 목소리에는 사랑과 죄책, 회한과 체념이 얽혀 있었다. 도준은 그것을 단순한 도덕의 잣대로만 가를 수 없음을 직감했다. 평생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온 고모부의 고백은, 그의 삶을 관통한 불가피한 굴레였는지도 모른다.


-두 여자 모두를 사랑했나요? 아니면, 고모는 껍데기 사랑만 받은 건가요?

-이제 와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렇지만, 그분을 보쌈해서 멀리 달아날까 욕심을 낸 적도 있었지. 기차표까지 끊었는데, 네 고모가 마음에 걸려 결국 떠나지 못했어... 고모한테는 미안해서 더 잘해줬고, 윗집 그분은 안타까움에 더 많은 걸 베풀려고 했지. 그러면서도 늘 두 여자 모두에게 미안했어.


고모를 두고 멀리 떠날 생각까지 했었다니. 도준은 정신이 아뜩해졌다. 고모부는 평생 한 여자를 놓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살아왔다. 윗집 그분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과거에 머물며 그 집을 돌보았다. 도준은 한때 그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고모 몰래 저지른 부도덕한 행위를 원망했고, 오로지 고모부만 바라보며 살아온 고모가 안쓰러워 가슴이 저렸다.


하지만 지금, 서윤에 대한 갈망 속에서 그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그녀를 향한 벗어날 수 없는 열망이 고모부가 한 여자를 놓지 못한 이유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두 집안에 얽힌 아픈 사랑의 흔적이 비밀스러운 유산처럼 자신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사랑이 결국 고모부의 삶을 옭아매고 정의했듯, 언젠가 자신의 삶 또한 같은 방식으로 규정될 것만 같은 예감.


‘나는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도준은 그 질문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고모부와의 대화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사촌 형 집을 나서는 그의 머릿속에 ‘사랑인가, 히말라야인가’라는 생각만이 어렴풋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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