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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한동안 어둠에 잠겨 있던 타멜 중앙로에 전깃불이 돌아오자, 외국인 거리 특유의 활기가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시곗바늘과 정지된 여백의 순간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낡은 릭샤를 끌던 운전사가 천천히 멀어지고, 옷 가게와 기념품 가게, 타로 점집 앞에도 불빛이 번지며 거리 전체가 다시금 살아 숨 쉬었다.


삼거리 반스 책방 앞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군밤을 팔고 있었다. 도준은 환한 불빛에 이끌리듯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매장 안에는 여행객들이 두고 간 중고 서적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고, 장식장 위에 정갈하게 놓인 그림엽서와 기념품들도 네팔 전통의 색감과 문양으로 이방인의 시선을 끌었다. 


도준은 작년도 판 ‘론리 플래닛’ 가이드북을 잠시 넘겨본 뒤, 지도들이 꽂혀 있는 섹션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다양한 지역의 지도를 살펴보다가, 마침내 에베레스트가 있는 쿰부 지도를 뽑아 들었다.


잠시 후, 다시 거리로 나온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타멜의 고즈넉한 밤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 여행객들이 분주히 오가고, 식당에서는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함께 샤데이가 몽환적인 목소리로 부르는 ‘Smooth Operator’가 흘러나왔다. 옷가게에 걸린 전등 불빛은 진열대 위 기념 셔츠와 손뜨개 모자, 두꺼운 스웨터들을 은은히 비추었다. 흘러넘치듯 반짝이는 알록달록한 원색들이 밤 풍경 속에 생기를 더했다.


기념품 가게 앞을 지나치려는데,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What time is it?


그는 무심코 왼손을 들어 올려 손목에 차고 있던 아보셋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느닷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신기하게 생겼네요. 이건 무슨 시계예요?


횡계 별장, 목요일 오후.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던 장면이 아직 선명한 필름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차에 몸을 싣고 사라진 후로, 도준은 삶의 중심을 잃고 무기력한 시간 속을 맴돌았다. 매일같이 오대산 자락을 달리던 일상의 리듬도 흐트러졌다. 그녀가 없는 횡계는 아무도 없는 숲의 적막처럼, 이제 어떤 의미도 건네지 못했다. 결국 일주일 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충동적으로 서울 방향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그녀가 있는 도시로 가자.’


사랑이라는 열병에 잠식된 영혼은 텅 빈 갈증에 쫓기듯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그녀가 일하는 인사동 거리를 서성였다. 그림자만이라도 스칠까 하여 리온 갤러리 주변을 배회하는 일만이 그의 결핍을 붙들어두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으나, 운 좋게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두어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가슴이 터질 듯 요동쳤지만, 차마 가까이 다가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철없던 시절의 무모한 격정은 이미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횡계 숲길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줄곧 마음을 옥죄었다.


-당신 누구야?


낯선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이명처럼 귓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약혼자였다 해도 하루 전 자신이 적어준 번호가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갔는지, 그 의문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누군가의 보호와 강력한 견제 안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앞날이 예정된 사람 앞에 무턱대고 나서는 일은 결국 불필요한 혼란만 초래할 뿐이었다. 게다가 다가올 시간에 대한 불확실성과 자신감의 결여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로체 남벽이라는 치명적인 도전이 눈앞에 버티고 있는 한, 그 어떤 약속이나 책임도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민다 해도, 언젠가 자신이 비겁하게 그 손을 놓아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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