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네팔은 바닷길이 없는 지형 탓에 오래도록 연료 부족에 시달려야 했고, 그 고단한 일상 속에서 잦은 정전은 이미 흔한 풍경이 되어 있었다.
여느 날처럼, 타멜 거리가 갑자기 암흑에 잠기자 상점가 곳곳에서 가스등이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환하게 타오르는 불빛들이 어둠을 타고 번져가며, 거리는 차츰 밤의 몽환적인 숨결을 되찾았다. 어두운 골목을 가르는 빛의 물결에는, 어디선가 되살아난 듯한 낯선 노스탤지어가 피어올랐다.
뚜벅뚜벅, 어둠이 내려앉은 포석 위로 도준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돌이 울퉁불퉁하게 깔린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길수록, 무언가 이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듯한 공허가 깊어졌다.
골목 끝 담배 가게 앞에 이르러 그는 걸음을 멈추고, 짙어가는 밤하늘을 막막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무심결에 흘러나온 한숨이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이 지독한 우울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인가?’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이 다시금 강박처럼 떠올랐다. 그녀가 탄 자전거는 앞으로만 곧장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 모양이다. 나에게는 한순간의 망설임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입술을 깨문 채, 깊은 회한에 몸서리쳤다. 철이 든 후로 자신이 이토록 어리석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죽음의 경계에 익숙해진 서른다섯의 사내가, 울음을 삼키는 아이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로운 여자와의 만남이나 격렬한 연애 감정은 더 이상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녀와의 이야기도, 잃어버린 분홍신을 되돌려주는 그 순간까지라고 믿었다. 그때가 되면 오랜 숙제를 끝내고, 미련 없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 인연의 끝자락에서 그는 아직도 그녀의 분홍신을 한 줌 쓰라린 꿈처럼 품고 있었다. 수시로 가슴을 짓누르는 멜랑콜리한 감각은, 도대체 언제부터 드리워진 그림자일까. 왜 그녀라는 흔적 하나를 이토록 지워내지 못하는 걸까.
그녀를 낚시터로 데려가기로 했던 그날, 도준은 옆 샛길에서 튀어나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검은색 BMW를 보고, ‘혹시 그녀의 약혼자일까’ 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는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지 못했다. 한동안 긴장된 시선으로 차창 너머를 응시하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 그녀에게서 온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숨을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낮게 뱉은 한마디가 가볍게 떨렸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낯선 남자의 위압적인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당신 누구야?
도준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목구멍 언저리까지 어떤 말이 치밀어 올랐다가 이내 스러졌다. 무례한 말투의 이 남자가 그녀의 약혼자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날카로운 쇳조각처럼 그의 내면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신이 던진 단 하나의 질문 같았다. 너는 누구인가. 그녀에게 너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감히 어떤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자신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이 번호가 왜 여기 있어? 당신 누구야?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거칠게 다그쳐왔다. 휴대폰은 손안에서 납덩이처럼 무거워졌고, 도준은 자괴감에 잠긴 채 끝내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검은색 BMW가 막다른 길 끝에서 다시 돌아 나온 건 십여 분쯤 지나서였다. 멀리서도 그녀가 조수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불길한 상상이 이 순간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 안의 침묵 속에 고립된 채, 그 어떤 움직임도 허락되지 않는 처지였다. 고개를 돌릴 수도,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도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녀에게, 나는 어떤 의미인가.
대답 없는 메아리, 응답받지 못한 질문이 심장을 짓눌렀다.
스물두 해 만에 기적처럼 다시 찾아온 인연이, 수많은 갈등과 망설임을 남긴 채 이번에도 그의 곁을 천천히 지나치고 있었다. 다시 그녀를 영영 잃어버려야 하는 것일까.
용천 계곡, 세찬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소녀,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던 소년의 인공 호흡. 그 모든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오래된 진실 하나로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약혼자보다 앞선 인연이었다고, 처음 사랑이고 첫 키스였다고 말하는 건 제정신 아닌 사내의 헛된 고백일 뿐이었다.
그녀는 그가 없는 미래를 향해 곧장 달려 나갔고, 그는 여전히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여기 홀로 서 있었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헤어진 그때부터 거의 매 순간 그녀 생각이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이었고, 신열처럼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몹쓸 역병과도 같았다. 사랑인지, 연민인지, 혹은 질투인지조차 분간되지 않은 채 오직 안타까움과 그리움으로만 각인된 그녀의 얼굴이 끊임없이 눈앞을 맴돌았다.
야박하게도 그녀에게는 끝끝내 전화 한 통 없었다.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화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이미 완벽하게 다른 세계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녀가 무슨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보겠는가. 번듯한 약혼자와 축복된 결혼식, 안온한 가정의 울타리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그녀와 함께한 기억들조차 한 겹 베일에 싸인 듯 점점 흐려졌다. 얼굴 모습과 목소리, 수줍은 미소조차 아득한 장막 너머로 사라져 가는 듯했다. ‘어쩌면, 이게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그는 타이르듯 자신에게 말했다. 따뜻하고 안전한 삶이, 결국 그녀에게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