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파노라마 포인트’ 정원에서는 소박하지만 활기 넘치는 바비큐 파티가 한창이었다. 한국에서 온 원정대와 방송사 관계자, 신문사 기자, 세르파들이 길쭉한 나무 테이블에 빽빽이 둘러앉아 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왁자한 대화가 밤공기를 데웠다. 허공에 매달린 노란 전구는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리며 천막 주변을 은은하게 밝혔다. 바비큐 그릴에서 피어오른 뿌연 연기가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자욱이 퍼져나갔다.
도준이 문형근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서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들뜬 분위기는 한순간 숨을 고르듯 가라앉았고, 몇몇은 도준의 얼굴을 확인하며 긴장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 틈에서 작달막한 키에 왜소한 체격을 지닌 사내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마나슬루 원정대의 대장이자, 이름만으로도 회자되는 인물, 김봉산이었다.
도준보다 열 살 위인 그는 8천 미터급 14좌 가운데 10개를 완등하며, 한국 산악계의 전면에 나선 지 오래였다. 그 놀라운 성과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TV 프로그램과 광고 모델 활동을 통해 더욱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다.
하지만 도준에게 고산등반의 본질은 단순히 정상에 오른 ‘횟수’가 아니라, 어떤 루트를 택했는지, 어떤 태도로 산에 접근했는지에 달려 있었다. 이 점에서 김봉산은 늘 논란의 한복판에 있었고, 본인 또한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어느새 마흔 중반에 접어든 그는 여전히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생의 전부를 건 도전이기보다, 명예와 생계를 위해 반복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산을 업으로 삼아 왔던 그는, 등반이 더 이상 특별한 선택이 아닌, 그저 오래 해온 ‘직업’이 되어버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점에서 도준은 김봉산과 전혀 결을 달리했다. 체질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렸고, 지금껏 완등한 8개의 봉우리 중 5개는 웬만한 고수들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난이도가 극도로 높은 루트들이었다.
기록으로 따지자면 김봉산이 앞서 있었지만, 실력만큼은 도준이 단연코 한 수 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방향도 방식도 다른 두 사람이 오늘 이 정원에서 마주한 것이다.
-아, 준이 아냐. 여기서 또 보네.
김봉산이 술잔을 내려놓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여전하시네요. 이번엔 마나슬루에 오르신다고요?
-괜히 또 가보는 거지, 뭐. 벌써 두 번째야. 근데 넌 또 뭘로 우릴 놀래킬 작정이야?
-놀래키다뇨. 별말씀을요.
-내가 실없는 말 하는 줄 알아? 허허. 자, 소개 좀 하지. 다들 이름은 아실 거야. 도준이야. 이 바닥에선 황소고집으로 꽤 이름난 친구지.
그는 연거푸 손짓하며 사람들을 돌아봤다.
-이쪽은 방송 촬영하러 같이 온 최연걸 피디.
-지면을 통해서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작년에 K2 등정하셨죠?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피디가 정중히 명함을 내밀었다. 도준은 예의상 한 번 들여다본 뒤, 곧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이쪽은 카메라맨 김상일 씨, 오늘 바비큐 파티의 물주인 윤종일 기자, 우리 팀 막내 이종학 군… 어, 한 명 더 있었는데 어디 갔지?
-자, 자, 이제 좀 마십시다. 배고파 죽갔구만.
문형근이 너스레를 떨며 먼저 자리를 잡았다. 도준도 빈 의자를 끌어와 그 옆에 앉았다. 가볍게 허기를 채운 뒤, 적당한 순간에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때 남자 요리사가 잘 구워낸 돼지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커다란 은쟁반에 담아 왔다. 테이블 위에는 여러 안줏거리와 생 미구엘 병맥주, 쿠쿠리 럼, 좁쌀을 발효시켜 만든 네팔의 전통주 '똥바(Thomba)', 그리고 누군가 인심 좋게 꺼내놓은 발렌타인 17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김봉산이 발렌타인을 들어 올리며 잔을 권했다.
-준아, 좀 마셔라. 방금 막 서울에서 온 길이지?
-예.
-우린 도착한 지 일주일 넘었어. 마저 준비하려면 사나흘 더 있어야 할 것 같고.
도준은 묵묵히 잔을 털어 넣고, 김봉산의 잔에도 술을 채워주었다. 낯선 얼굴이 하나 늘어난 탓인지, 술자리의 공기가 잠시 어색해졌다. 그는 방송국 피디와 몇 마디 주고받고 나서,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았다. 가벼운 농담과 허세가 뒤섞인 분위기보다는, 혼자 밤길을 걷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난 잠깐 볼 사람이 있어서요. 나중에 봐요.
문형근이 좀 더 있으라며 그의 옷깃을 잡았지만, 그는 끝내 그 손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