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네팔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에 둘러싸인 내륙 국가이다. 북쪽에는 에베레스트를 포함해 해발 8000미터가 넘는 여덟 개의 봉우리가 장대한 벽처럼 이어지고, 남쪽의 테라이 지역에는 정글과 늪지대, 초원이 어우러진 국립공원들이 자리 잡고 있다.
도준이 일본과 방콕을 거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한 건 4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트리부반 국제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마치고, 여행자들의 거리인 타멜에 도착했을 무렵 도시는 이미 해거름 녘의 어둑한 그림자가 골목마다 짙게 깔려 있었다.
오래된 건물 지붕 위에도 푸르스름한 밤의 정적이 내려앉았지만, 중앙로에 이르자 식당과 상점들이 빽빽이 늘어선 거리는 환한 불빛과 인파로 묘한 활기를 띠고 있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낡은 차량이 뒤엉킨 사이로 자전거와 릭샤가 아슬아슬하게 틈을 비집고 지나갔다.
도준은 곧장 타멜 중심지 인근의 ‘파노라마 포인트’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한국인 등산가 문형근이 운영하는 이곳은 네팔을 찾는 한국 산악인들과 여행객들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었다.
그는 커다란 배낭을 둘러멘 채 택시 운전사를 뒤따라 로비로 들어섰다. 라운지에서 신문을 읽던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두 팔을 벌리더니 크게 소리쳤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도준이 아냐. 이, 녀석!
도준이 배낭을 벗기도 전에 문형근이 달려와 얼싸안았다.
-형, 잠깐만, 이것 좀 내려놓고요.
도준은 배낭을 벗어 한쪽 벽에 기대 놓았다.
문형근은 손마디 두 개가 잘려 나간 뭉툭한 손으로 도준의 어깨를 연신 두드렸다. 잃어버린 동생이라도 다시 만난 듯 몹시 반가운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좀이 쑤실 때가 됐을 텐데, 어째 이 귀신이 안 나타나나 했지.
-그래서 이렇게 왔잖습니까. 그동안 잘 계셨수?
-그럼. 나야 일 년 열두 달, 만고땡이지. 허허.
택시 운전사가 카운터 앞에 짐꾸러미들을 내려놓고 뚱한 얼굴로 기다렸다. 도준은 350루피를 건넸다. 택시비와 팁을 포함한 액수였다.
-통관하는 데 별문제 없었지?
-네, 그럭저럭요. 빈방 있어요?
-자식, 아무려면 너 하나 재울 방 없겠냐. 정 없으면 마누라 쫓아내고, 나랑 자면 되지 뭐.
-형수님이라면 몰라도, 문 선배는 절대 노 땡큐입니다.
-애가 갑자기 부끄러움을 타네. 얌마, 팔십육 년 마칼루에서 한 달간 동거한 걸 벌써 잊었어?
-그 코 고는 소리… 와, 진짜! 그때 생각만 해도 아직 제 머리가 어질어질해요.
-얘가 서울에만 가면 성격 개차반 돼서 돌아온단 말이야. 인간이 언제 되려나? 아무튼 앉아.
문형근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자기 옆자리를 두드렸다. 도준은 배낭에서 디스 담배 한 보루를 꺼내 건넸다.
-그래, 나는 담배나 피우다 뒈져라, 그 얘기냐? 자식, 고맙다.
-외국 나오면 한국 담배가 그립잖아요. 여긴 어때요?
-늘 똑같지. 네팔 시계는 멈춰 있는 거 몰라? 그게 매력이지. 그래서 내가 여기 붙어 사는 거고.
그때 식당 쪽에서 누런 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노라마 포인트’를 관리하는 세르파 체링이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도준 형, 안녕하세요. 오늘 비행기로 들어오신 거예요?
오랫동안 한국 원정대 곁에서 일을 해온 그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응. 체링, 그동안 잘 있었니?
-그럼요. 잘 있었죠. 저 두 달 전에 결혼했어요.
-그래? 총각 신세를 면한 거야? 어쩐지 얼굴빛이 훤해졌네.
-제 와이프도 여기서 일해요. 한국 요리 잘해요. 미역국, 닭도리탕. 나중에 소개해 드릴게요.
체링은 수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문형근이 도준의 짐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체링, 이것들 이층으로 옮겨. 이백칠 호 비었을 거야.
-알았어요. 도준 형, 나중에 또 얘기해요.
체링은 카운터에서 열쇠를 꺼낸 후 큰 배낭부터 번쩍 짊어지고는 작은 것들도 주섬주섬 챙겨 들고, 정원으로 향하는 미닫이문을 열고 나갔다.
객실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이층 목조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준이 묵을 방으로 가려면 바깥쪽에 설치된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열린 문 너머로 등산복 차림의 남자들이 술자리를 벌이며 둘러앉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에요?
-서울에서 신문사 기자들이랑 방송국 사람들이 몰려와서 한바탕 소란 피우는 중이야. 팔일오 특집 찍으려고 마나슬루에 올라간대. 김봉산 대장이 이끄는 팀이지. 야, 너는 진짜 먹을 복 하나는 타고났나 보다. 마침 새끼 돼지 한 마리 잡았거든. 자, 우리도 나가서 한잔해야지.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안 낄게요.
-얌마, 이제는 사람들하고도 좀 어울릴 줄 알아야지.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안 모이는 법이야. 같은 동네 사람들인데, 인사는 해야지.
도준은 평소에 남들과 쉽게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