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강남성심병원 입구에는 주차 대기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병원 건물들 사이로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과 방문객들, 바삐 움직이는 주차 요원들이 뒤섞여 혼잡을 더했다.
서윤은 오전 근무만 마친 뒤 반차를 내고 이곳을 찾았다. 김 씨 할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마음 한편이 설렜지만, 금기의 선을 넘고 있다는 자각에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며 주변의 시선까지 의식되었다. 여기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현실적인 어려움과 스스로 쌓아 올린 심리적 장벽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했다. 김 씨 할아버지를 통해 도준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어딘가 너무 순진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도준의 고모부라면 조카의 연락처쯤은 당연히 알고 있을 터였다. 문제는, 그에게 도준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부탁할 만한 뚜렷한 명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큰할머니 사후에 일부러 자청해서 별장 관리를 맡은 분이긴 했지만, 그것과 도준의 개인 정보는 별개의 사안이었다. 괜한 일로 불쑥 전화를 건다는 건 무모해 보였고, 자칫 불필요한 오해와 의심을 살 가능성도 컸다.
그럼에도, 김 씨 할아버지를 거치지 않고는 도준과 닿을 길이 없었다. 며칠을 망설이다 횡계 주민센터를 통해 관리인 아들의 번호를 어렵사리 얻어냈다. 도준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함이, 끝내 이성적 판단을 눌러버린 것이다. 몇 차례 전화를 걸고 기다린 끝에, 마침내 김 씨 할아버지 큰아들 김계주와 연결됐다. 다행히 그는 십여 년 전까지 윗집에 혼자 살던 큰할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하신 겁니까?
아들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서윤은 침착한 어조로, 이미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던 말을 꺼냈다.
-얼마 전에 횡계에 갔다가, 할아버지께서 큰 수술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건강은 좀 어떠신지 궁금해서요. 저희 부모님께서 안부 전화를 드리라고 하셔서요. 그동안 저희 빈집 관리로 신세를 많이 졌거든요.
-아아, 그렇군요. 이렇게 염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들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서윤은 김 씨 할아버지와 직접 통화하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내비쳤다. 아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얼마 전 낙상 사고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서윤은 병원과 입원실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고, 오늘 작은 화분 하나를 손에 들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이제 김 씨 할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도준 이야기를 꺼낼지가 남은 숙제였다.
그녀는 곧장 병원 정문과 가장 가까운 본관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3층 입원실에는 네 병상 가운데 두 곳에만 환자가 누워 있었다. 그곳은 무심한 기계의 숨결과 인간의 연약함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냉랭한 기운 속에 병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맴돌고, 창문으로 들어온 오후 햇살이 벽에 길고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윤은 두 침대의 이름표를 살핀 뒤, 창가 쪽 노인에게 다가갔다.
‘김재구, 77세.’
김 씨 할아버지는 그녀가 기억하던 예전 모습과 너무 달랐다. 뙤약볕 아래 거칠어진 촌부의 얼굴에는 세월의 깊은 골이 새겨져 있었고, 왼손등에는 가늘고 투명한 링거 튜브가 생명줄처럼 매달려 있었다. 고된 농사일도 단번에 척척 해치우던 손은 이제 앙상하니 쪼글쪼글해졌고, 푸르스름하게 멍든 바늘자국만 가득했다. 주변 어디에도 간병인이나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다. 서윤은 화분을 든 채,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침대 발치에 어정쩡히 서 있었다.
그때 고요하던 실내 공기를 휘저으며 간호사가 의료용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큰 목소리로 김 씨 할아버지 이름을 부르더니, 혈압과 혈당을 재겠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할아버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이 달싹거렸다.
간호사는 유치원 선생님 같은 태도로 생년월일을 불러주며, 정보가 정확한지 재차 확인했다. 할아버지는 낮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맞아요.’ 하고 대답했다. 간호사는 만족한 표정으로 ‘그렇지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링거 챔버를 톡톡 쳐 약물 흐름을 확인한 뒤, 혈압과 혈당 수치를 재고 병원 차트에 기록했다. 서윤을 가족으로 생각했는지, 간호사는 현재 환자 상태를 자세히 설명했다.
-혈압은 괜찮지만 오늘 아침부터 당수치가 좀 높으세요. 담당 선생님께 제가 직접 말씀드릴 테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저녁부터는 식단도 약간 조정될 수 있을지 몰라요.
-고맙습니다.
예기치 않게 보호자 역할을 맡게 된 서윤은 보조 테이블에 화분을 내려놓고, 고개까지 숙여 간호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 모든 절차는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간호사가 가고 나자, 할아버지는 어리둥절한 눈길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근데… 누구신지?
서윤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그녀가 윗집 큰할머니의 손녀라는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진짜요? 정말 김순내 여사의 손녀라구요?
-네, 맞아요. 어려서 할머니 댁에 여러 번 놀러 갔었어요. 그때 할아버지를 뵌 적도 있고, 감도 따 주셨고요.
-맞아, 기억이 나는구먼. 어이쿠, 이렇게 훌쩍 컸구려.
-뭘요. 어느새 늙어 가는걸요.
-무슨 소리. 아직도 살아갈 날이 구만리 같은 아가씨가. 허허.
웃음 속에 스며든 미묘한 떨림, 신기하다는 듯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엔 애틋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김순내 여사 손녀라서 그런지 어째 그쪽이 내겐 남 같지 않아요. 접때 우리 집에 비타민 선물도 가져왔다면서요? 내 조카가 들고 와서, 잘 받았소.
-별거 아닌걸요. 저희 부모님께서 할아버지 빨리 쾌차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셨어요.
-고맙다고 전해주시오.
-그런데 그 조카분 말인데요.
-준이요? 도준이가 왜?
할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