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지하철역에서 집까지는 10분 거리였다. 하루의 끝자락에, 인적 드문 어두운 길을 지나 초등학교 앞 차도를 건넌 뒤, 옥수탕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연립주택과 단독 주택이 늘어선 골목에 희미한 가로등 불빛 하나가 조는 듯 서 있었다. 어느 집 담장 아래, 길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뒤적이다가 그녀의 발소리에 놀라 급히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열쇠로 대문을 열고 집 마당에 들어서자, 거실의 흐린 유리창 너머로 올케가 분주히 오가는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평소 같으면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인데, 오늘따라 집 안에는 어수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윤이 거실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이미 술에 얼큰히 취해 있었고, 오빠는 벌겋게 달아오른 낯빛으로 무언가 열변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오빠가 부모님 집에 다시 나타난 건 거의 두 달 만이었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사라진 뒤,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새 얼굴은 꺼칠하니 겉늙은 듯 보였고, 광대뼈가 도드라질 만큼 두 볼은 홀쭉했다.
-아가씨, 이제 오세요? 저녁은요?
올케가 두툼하게 부친 녹두전 한 접시를 밥상에 올려놓으며 짧게 눈길을 던졌다. 평온한 말투와 달리, 축 처진 어깨에는 온종일 가사 일에 시달린 피로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벌써 먹었겠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오빠는 손바닥으로 술잔을 굴리며, 서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경계하듯 탐색하는 태도에서 특유의 허세가 느껴졌다. 실내에는 기름내와 꽁치구이 냄새가 가득했지만, 그런 온기만으로는 가족 사이의 냉랭함을 덜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머니는 안방에 계세요. 오늘도 하루 종일 선호랑 씨름하시느라 많이 고단하신가 봐요.
올케가 담담하게 말했다. 선호는 두 살배기, 오빠의 아들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내일 출근할 사람이 이렇게 늦게 다니면 어떻게 해. 데이트하다가 온 거야?
오빠는 무심한 척했으나, 속내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그의 힐끔거리는 눈빛에는 신우건설에 대한 기대와 미련이 담겨 있었다. 혼맥이라는 가느다란 연줄에 매달려 그 집안에서 흘러나올 작은 콩고물이라도 바라는 절박한 심정. 그렇다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내 핏줄 앞에서 차마 불편한 내색을 보일 수는 없었다. 부모님에게 하나뿐인 아들이자, 그녀에게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친오빠가 아닌가.
-아니. 오늘은 대학 동창들 좀 만났어. 오빠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서윤은 애써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나야 바쁘게 잘 지냈지. 지방에서 사업하는 친구 일도 좀 도와주고.
오빠의 얼굴에는 어색한 웃음이 번졌고, 올케는 그런 오빠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신 없는 동안 아가씨가 대신 횡계 다녀왔어요. 그런 일은 남자들이 나서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쳇! 집안일에 남자 여자 일이 따로 있나?
오빠는 더는 말대꾸를 이어가지 않은 채 술잔을 기울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굳어진 입매에는 언짢은 기색이 스쳤다.
‘횡계’
그 지명이 다시금 서윤의 머릿속에서 둥근 파문을 일으키더니, 곧이어 몇 개의 장면이 작은 스틸사진처럼 연달아 떠올랐다. 랜드로버가 멈춰 선 숲길. 김 씨 할아버지네 집 마당. 펑크 난 자전거 타이어. 별장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초록색 스프링 노트와 코끼리 머그잔. 그 모든 순간의 끝에서 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착제가 잘 굳었나 보네요. 당분간 자전거 타는 데 문제없겠어요.
서윤은 가늘게 숨을 삼킨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실 한쪽에 켜진 TV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볼륨이 낮춰져 있고, 재방송 중인 축구 경기가 무심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관중의 함성도 해설자의 목소리도 사라진 화면은 거실의 침묵과 섞여 한층 쓸쓸하게 느껴졌다. 텔레비전 속 무음의 스포츠 중계는 마치 수많은 사람이 무대 위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제자리만 맴도는 무언극을 떠올리게 했다. 서윤은 문득 그 장면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목격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강태일 실장이랑은 요즘 어때? 잘 지내는 거지?
그녀는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려다 오빠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뭐, 그냥…
-그냥은 아니지. 너희 약혼한 지도 꽤 됐잖아.
-왜 그래 또?
-결혼식 날짜는 언제쯤 잡을 건데? 사람 마음은 갈대 같은 거야. 특히 남자는 더 그래. 태일이한테 눈독 들이는 여자들도 꽤 많을걸.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여기저기서 쿡쿡 찔러댈 거야. 그러니 너 조심해.
서윤은 오빠를 흘겨보았다. 만날 때마다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속셈이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었다.
오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층 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막말로, 빨리 시집가서 부잣집 사모님 소리 들으며 떵떵거리면 좋잖아. 나도 잘사는 동생 덕 좀 보고 살아야지.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뭐… 서로 돕고 사는 게 좋긴 하지.
아버지까지 거들고 나서자, 서윤은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북받쳐 오르는 걸 느꼈다.
-식구들 도와주려 나더러 빨리 결혼하라는 거야? 내가 무슨 심청이야?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서윤도 자신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귓가에 울린 그 낯선 어조는 단순한 반박이 아니라, 오래 눌러 왔던 원망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처럼 들렸다. 실내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는 듯했다. 서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