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전철역에서 나오자, 편의점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한 남자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상대방과의 대화가 즐거운 듯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마법의 환영처럼 공중전화 부스 속 남자의 모습 위로 도준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녀의 입술 끝이 살짝 떨렸다.
–제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며칠간 더 고모부 집에서 지낼 건데, 그 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고모부를 대신해 제가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도준이 초록색 노트 위에 적어 준 10자리 숫자는 결국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날의 대화와 그 목소리는 여전히 서윤의 마음 깊이 남아 있었다.
-우리 아직 통성명도 못 했군요. 제 이름은 도준입니다.
다시 횡계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몇 번이나 당장 고속버스터미널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과 싸워왔는지 모른다. 거리 위를 지나는 시외버스만 보아도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을 붙들어 둔 건 현실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이었다.
자신에게 이미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다는 사실,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함부로 처신할 수 없다는 자각.
인간 사회는 관계와 책무로 서로를 얽매어 왔다. 서로를 구속하는 일이 구원이라 믿도록 만들고, 감정의 충동보다 일상의 성실함이 우선이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이미 잘 디자인된 미래의 청사진을 감히 구겨버릴 만큼 어리석거나 용감하지 않았다. 염치를 모르거나, 배은망덕한 여자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배운 대로 늘 성심성의껏 살아왔다.
그녀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그를 만나게 된다면, 무언가 중대한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법.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선택 또한 예정된 궤도 안에 갇힌 건 아닐까.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을 집어 들든, 어떤 운명을 받아들이든, 정해진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 앞에서 그녀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언젠가 다다를 미로의 끝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결과는 같을지도 모른다는 체념이 스쳐갔다. 여기 이대로 멈춰 서는 것, 그것만이 상처를 남기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가슴에 단단한 빗장을 질렀다. 그러나 때론 감정의 사슬이 살짝 느슨해지는 것만 같았다. 편의점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남자를 본 순간, 가슴속에 눌러 두었던 것들이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외면해 왔던 그리움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던 맹세가 한순간 연기처럼 허무하게 흩어졌다.
정수리를 뜨겁게 내리쬐는 유혹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 횡계로 가자! 그와 낚시도 하고, 쾌락의 꿀을 빠는 벌처럼 달콤한 추억들을 맘껏 쌓아 올리자. 인생은 결국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일회성의 무심한 꿈과 같고, 지나간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찬란했으나 허망한 순간들에 불과하다. 미래의 내 삶을 함부로 깨뜨려버릴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이고, 내 선택을 납작하게 짓눌러버릴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뿐이 아닌가.
젊은 남자는 전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불이 꺼진 텅 빈 전화부스는 어두운 거리에 홀로 떠 있는 난파선처럼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주머니 속 동전 두 개를 꺼내 조심스럽게 투입구에 넣었다.
신호음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전화기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메신저처럼 그녀의 손바닥에 단단히 들러붙어 있었다. 횡계 별장에서 도준이 적어 준 열 자리 번호는 이미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지워졌지만, 그날의 다정했던 온기를 되살리듯 0부터 9까지 숫자판을 하나씩 눌러갔다.
첫 번째 벨이 울리고, 곧 차갑고 무심한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신호음이 반복될수록, 그녀는 얼어붙은 겨울 새벽의 그림자처럼 고립된 자신을 느꼈다. 부스 안을 맴돌던 소리는 이내 사라졌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그녀는 고요한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바로 그 자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