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홍대 밤거리는 빛의 향연을 쏟아내고 있었다. 수많은 상점과 포장마차, 길거리 가판대 사이로 밤의 풍경이 소란스러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교차로를 지난 후 피카소거리 아래쪽으로 한참을 걸어갔다.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오밀조밀한 가게와 식당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가스등이 켜진 핫도그 가게와 액세서리 숍, 모자 전문점을 지나 미술용품을 파는 호미 화방 근처에 다다르자, 컨트리 스타일로 꾸며진 퓨전 식당이 눈길을 끌었다. 가게 앞에서 ‘오늘의 특별 메뉴’를 칠판에 적고 있던 여자 종업원이 환한 미소로 반기며 칸막이가 있는 테이블로 그녀들을 안내했다.


-아, 배고파 죽겠네!


제이는 메뉴판을 빠르게 훑은 뒤, 해물 샤브샤브 2인분과 생맥주 2.5리터를 주문했다. 맥주가 너무 많지 않나 싶었지만 서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늦은 밤까지 교정쇄와 씨름한 제이에게, 이 정도 도파민 충전은 필요했다.


잠시 후, 종업원이 무쇠 냄비를 들고 와 테이블 중앙에 놓인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맑은 육수가 보글보글 끓기를 기다리며, 제이는 능숙하게 맥주잔 두 개를 가득 채웠다.


-이걸로 나 좀 쉬게 해줘. 아니면 네 책임이니까.


말끝에 얹힌 장난기가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온기를 퍼뜨렸다.


-덕분에!

-건배!


두 개의 맥주잔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하얀 거품이 잔 위로 넘실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하루 종일 쌓인 피로와 긴장도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종업원이 쌈 채소와 고기를 담은 음식 카트를 밀고 오더니, 테이블 위에 빈 접시와 여러 양념 소스를 놓아주었다. 그녀들은 뜨거운 육수에 살짝 담갔다 건져 낸 느타리버섯부터 먹기 시작했다.


-요즘 일이 고됐던 모양이야. 얼굴색이 안 좋아.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 괜찮아. 한강에서 자전거 좀 타느라 얼굴이 그을렸어.

-태일 씨가 잔소리 안 해? 그 남자 스타일은 너 얼굴 타는 거 안 좋아할 텐데.

-내 얼굴이야. 내 얼굴 내가 태우는데, 뭐가 어때서?

-어머, 둘이 싸웠나? 오늘 좀 예민한걸.

-내가? 예민해? 왜?


그 순간, 한 남자의 목소리가 기억의 배경음처럼 귓가를 스쳤다.


-우리 내일 낚시하러 갈래요? 반나절이면 충분해요.


흡.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온 세상이 전혀 다른 빛깔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태일과 함께하는 시간은 늘 가슴이 무거웠다. 숨소리조차 끔찍하게 느껴지는 그와는 달리, 도준이 잠시 머물다 간 마음의 빈터에는 미련만이 감돌았다.


도준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서윤은 그와 함께한 순간들이 꿈처럼 흐릿해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와의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가슴 한쪽이 저릿저릿해졌다.


제이가 자기 맥주잔으로 서윤의 잔을 툭 건드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냐.


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래도 부럽다. 누구는 약혼자도 있고, 곧 결혼해서 천사 같은 아이도 낳을 거잖아.

-나는 울 엄마한테 천사였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집에 가서 물어봐.

-부러우면 너도 결혼해. 너는 왜 이렇게 혼자인데?

-나 남자들한테 관심 없는 거 알잖아. 나는 너를 사랑하잖니.


제이의 입술에 어른거린 씁쓸한 미소에는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사연이 응어리져 있었다. 제이가 처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내비친 건,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날 밤, 서윤은 제이 집에서 시험공부를 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새벽녘, 낯선 손길이 숨을 죽이며 그녀의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조금 기묘한 꿈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살갗을 스치는 감촉이 너무 또렷해, 얇은 막 너머의 깊은 곳까지 전율처럼 번져갔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입술이 그녀의 입에 닿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손길의 주인이 제이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자신이 깨어 있다는 사실조차 내색할 수 없었다.


사지가 묶인 듯, 호흡마저 가늘어졌다. 그것은 사춘기 소녀의 의식 너머를 떠돌던 그 무엇. 두려움도 연민도 아닌, 아직 언어도 표정도 갖추지 못한 은밀한 떨림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서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보다 섬세하게 이해했다. 동성 간의 사랑과 우정이 얽혀 빚어낸, 쉽게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그 밤의 소극적인 사랑은 이제껏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못한 채, 둘만의 비밀로 남아 있었다.


서윤은 제이의 애틋한 심정을 오랫동안 가까이 느껴왔지만, 끝까지 모른 척했다. 그 마음을 우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받아들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제이 곁에는 가까운 인척 하나조차 없었다. 서윤은 늘 생각했다. 자신이 없으면 제이는 무중력 속에서 표류하는 우주선처럼 끝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서윤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고, 제이 또한 한결같이 그녀 곁을 지켜왔다.


-서윤아, 아까 보여준 그 모네 미술 동화책 말인데, 너도 그 시리즈 작업에 함께해 볼래?

-내가 어떻게? 아냐, 난 자격 미달이야.

-자격 미달이라니? 너도 이미 유럽 여행기를 낸 작가잖아. 《파리에서 베네치아까지, 고양이처럼》

-제목은 느낌 좋았는데…

-백 권쯤 팔렸나? 아니지, 반품된 게 더 많았어. 아직도 창고에 쌓여 있잖아.

-미안.

-그러니까 이번엔 나 좀 도와줘.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쓰고, 삽화도 직접 그려보는 거야. 유럽 여행기에 실었던 그림처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글과 그림을 이어주면 돼. 너라면 이 시리즈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거야.

-말이야 쉽지. 내가 정말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믿는 거야?

-그럼 믿지. 너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서 상도 많이 탔잖아. 그때도 그림 잘 그렸고. 기억나? 미술 대회에서 네가 내 그림 대신 그려준 거.

-그럼, 기억나지.

-근데 나만 상 받고, 넌 못 받아서… 그땐 정말 미안했어.


송정초등학교 3학년 시절, 서윤은 교내 사생대회에서 제이의 그림을 대신 그려준 적이 있었다. 제이는 그 그림으로 우수상을 받았지만, 정작 그림을 그린 서윤은 아무런 상장도 받지 못했다. 그때 서윤은 커다란 나무문과 그 사이로 보이는 또 다른 세계를 그렸다. 양쪽 문은 도화지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고, 중앙에 화면을 가르듯 약간 벌어진 문틈으로 현실 너머의 공간이 아득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생이 넘기 어려운 기교의 벽 앞에서 그 그림은 손을 댈수록 무너져 내렸고, 끝내 참담한 흔적만 남았다.


그 실패가 단지 표현력 부족 때문이었다면, 서양화와 미술사까지 전공한 지금에는 같은 아이디어를 토대로 비로소 그 그림을 완성해 낼 수 있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혹여 나는 아직도 내 능력을 과신하며, 결코 잡을 수 없는 꿈을 좇고 있는 건 아닐까. 현실 저 너머, 실체의 열린 틈 사이로 얼핏 스치던 또 다른 세계가 결국 나조차 가질 수 없는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천천히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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