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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갤러리 안에는 그녀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손문기 선생 회고전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지만, 이제 남은 과제는 모든 작품을 다시 포장해 각 소장처로 반송하는 일이었다. 작품의 소유자는 개인 컬렉터부터 화랑, 미술관까지 다양했다. 일일이 연락하여 반환 절차와 배송 일정을 조율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았다.


서윤이 그동안 밀린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맞은편 책상에 앉아 있던 신입 직원이 도움을 요청해 왔다. 다가올 초대전 기획안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서윤은 잠시 그녀가 내민 기획안을 바라보다가, 몇 가지 조언을 건넸다. 신입은 금세 요지를 파악하는 것 같았다. 서윤은 선배로서 마음이 든든했다.


창고에서 동료와 함께 작품 포장 작업에 매달리던 서윤은, 뒤늦게 출근한 최희숙 관장으로부터 전화 호출을 받았다. 잠깐 화장실에 들러 옷매무새를 점검한 뒤, 서둘러 3층 관장실로 향했다. 최 관장은 책상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두툼한 서류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주위에는 평소보다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갤러리 운영이나 전시 기획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관장은 돋보기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서윤을 쳐다보았다.


-어서 와. 그쪽으로 좀 앉지.


그러면서 책상 앞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괜찮습니다. 얼른 내려가 봐야 해서요.

-그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내년 전시 일정 때문이지. 상반기에는 반드시 명 선생 초대전을 성사시켜야 해.

-아, 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서윤의 목소리는 경직되어 있었다.


최근 들어 최 관장은 명명희 작가 초대전에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여왔다. 그렇게까지 명명희라는 이름 석 자에 매달리는 이유는, 리온 갤러리의 잃어버린 명성을 되찾고 악화된 재정 상황을 타개할 돌파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리온 갤러리는 겉으로 보기엔 평온했지만, 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90년대 초반 화랑가에 닥친 침체는 리온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88올림픽 무렵 도산대로에 문을 연 2호점은 한때 화랑가의 활황을 등에 업고 빠르게 성장했으나, 결국 불황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그 여파는 인사동 1호점 운영에까지 악영향을 미쳤고, 머지않아 새 주인을 맞게 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직원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미술품 경매 시장까지 확산되는 변화 속에서 자신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불안이 서윤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녀가 대학 강단의 경력을 쌓으려는 이유도 최소한의 안전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관장은 명명희 선생 초대전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서윤은 초대전 일정을 당장 확정하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일본에 머물고 있는 명 선생이 병환 중이어서, 현재로선 전시 기획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이다. 정확한 병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양녀 김순자 역시 이에 대해서 아직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명 선생이 한동안 소설 『설국』의 주요 무대인 니가타현 온천지에서 요양할 예정이라는 소식만 전해졌을 뿐이다. 명 선생의 일본 체류가 단순한 건강상의 이유인지, 다른 사정이 개입된 것인지는 여전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럼, 언제쯤 정확한 일정을 잡을 수 있다는 거야?


최 관장은 한층 강압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글쎄요, 지금은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일단 전시 스케줄부터 정해야 해. 우선순위는 그게 먼저야. 그때 일주일이나 휴가도 줬잖아. 그동안 뭘 했다는 거지?

-초대전 방향을 다시 정리해 봤습니다. 작가님 상태가 변수라서, 몇 가지 경우를 나눠가며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검토만 하다 시간 다 가는 거 아냐? 일정은 숫자로 나와야지.

-작가님 병세가 어떤지 잘 몰라서… 순자 씨 쪽에서도 아직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고 있고요.

-답답하군. 직접 김순자부터 만나 확인하는 게 좋겠어. 이번에 새로 발표할 작품이 몇 점인지도 알아봐야 하고.

-네. 작품 수랑 기존 작품 중 출품 가능한 것까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서윤이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꾸벅 숙이자, 관장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탁 두드리며 덧붙였다.


-뭐든 변동 상황이 생기면 바로바로 보고해. 알았지?

-네, 그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관람객 하나 없는 늦은 오후였다. 관장실을 나와 3층 갤러리 홀을 가로지르던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텅 빈 마룻바닥 위에서 적막하게 울렸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횡계 별장의 목요일 오후가 눈앞에 되살아났다. 도준이 출입문을 나서려다 불현듯 돌아섰다.


-우리 내일 낚시하러 갈래요?


그의 눈빛, 나지막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이미 지나왔다는 자각에 현기증이 이는 듯 층계 난간을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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