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샤넬 백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그건 호의를 가장한 훈육이었고, 자존을 길들이기 위해 계산된 값비싼 미끼였다. 수경의 눈빛은 서윤의 여리고 예민한 내면을 단번에 꿰뚫을 듯이 차가웠다.
-그래, 앞으로는 이런 데 익숙해져야 해. 알지? 우리 식구들과 함께하는 삶은 이런 게 기본이니까.
그 말은 서윤의 가슴 한가운데 미세한 균열을 남겼다. 입술을 한 번 달싹였지만, 민망한 낯빛으로 끝내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그 비싼 샤넬 백을 받자니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고, 거절하자니 자존심만 내세운 허세로 비칠까 두려웠다.
수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블랙 플래티넘 신용카드를 꺼내 매장 직원에게 건넸다.
-이걸로 한꺼번에 계산해 주세요.
이 세상에는 할부 인생과 일시불 인생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직원은 눈이 잠시 커졌다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두 손으로 카드를 받았다. 태일은 지난주부터 해외 출장 중이었다. 자기 약혼녀가 장래 시누이 앞에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그가 지금 곁에 있다고 해도, 이 난감한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도사린 피해 의식마저 낱낱이 드러낼 것 같은 갤러리아백화점의 거울 속 세상. 서윤은 자신이 그 안에서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현란하게 반짝이는 조명들은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냉정하고 무관심하게 그녀의 존재를 비추었다. 감추고 싶었던 감정의 응어리들까지, 표본실 안의 개구리처럼 낯설고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수경과 헤어진 뒤, 서윤은 서둘러 인사동으로 돌아왔다. 작은 종소리와 함께 리온 갤러리의 출입문이 열렸다. 서윤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전시장 실내에는 뉴에이지 풍의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관람객은 많지 않았으나, 허공을 가르는 낮은 목소리와 바닥을 스치는 발소리가 늦은 오후의 고요를 가만히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뭔가 묵직한 것이 든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탓에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1층 카운터에는 보조 큐레이터 경숙 씨뿐이었다. 경숙 씨는 서윤이 들고 있는 봉지를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뭐예요? 혹시 쇼핑하러 갔다 온 거예요?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서윤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태일의 누이가 선물이라며 건넨 샤넬 백은 종이가방마저 지나치게 크고 화려했다. 한낮의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그 흰색 로고를 자꾸 힐끔거리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하철 화장실에 들어가 겉포장을 벗기고 본품만 챙겨 올까도 잠시 망설였지만, 혹시라도 돌려줘야 할 일이 생길까 봐 끝내 손을 대지 못했다. 결국 그것이 자신의 결정적인 치부라도 되는 양, 편의점에서 산 검은 쓰레기 봉지에 넣어 여기까지 들고 왔다. 그 샤넬 클래식은 태일 누이의 말들을 끝까지 견뎌낸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버릴 수도 없고, 손에 들고 있자니 더욱 꺼림칙했다.
-뭔데요? 어디 좀 보여줘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제 코는 못 속여요. 냄새가 난다니까.
경숙 씨는 자기도 한번 보자며 계속 졸라댔다. 서윤이 끝내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자, 그녀는 토라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요즘 세일하는 데 많던데… 나도 선배처럼 몰래 쇼핑이나 하러 갈까나?
-쇼핑은 주말에 하면 되지. 그럼, 수고해.
서윤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이고는 2층 사무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네 명의 연구원이 함께 쓰는 공간은 오늘따라 유난히 어수선했다. 도둑질한 장물이라도 감추듯 사물함에 샤넬 백을 밀어 넣고 돌아선 순간,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며 도준의 얼굴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한 달이 지났는데도 횡계 숲길에 멈춰 서 있던 랜드로버와 운전대를 움켜쥔 그의 얼굴은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 도준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죄책감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그를 외딴 숲에 홀로 남겨두고 온 기억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우연인 듯 마주친 인연은 고작 나흘 만에 찰나의 불꽃이 되어 사그라졌다. 미처 서로에게 다가서기도 전에 이별이 먼저 찾아왔다. 그날, 도준이 태일보다 먼저 별장 앞에 도착했다면 어땠을까.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도준의 랜드로버에 올라타고, 태일이 모는 BMW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길. 인생의 또 다른 갈래가 어쩌면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백일몽 같은 상상에 잠겨 있던 그 순간, 동료 직원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직원은 장난스레, 아무도 그녀가 오래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관장은 아직 갤러리에 나오지 않았고, 최 실장은 미팅 때문에 출타 중이었다. 그러나 오늘 일로 불편한 말이 오갈 거라는 예감이, 그녀의 마음에 가벼운 그늘을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