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아무도 없는 횡계 숲길에 한 남자를 두고 떠나온 지 한 달 남짓 지난 1997년 4월의 봄이었다. 오늘도 갤러리아백화점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화사한 조명 아래, 명품관 특유의 우아하면서도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유명 디자이너의 신상품과 값비싼 제품들이 가지런히 놓인 공간은, 모든 욕망이 정당화되는 세계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윤의 눈에 비친 이 찬란한 장소는 오늘따라 무기력한 권태를 불러일으켰다.


손에 든 쇼핑백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그녀의 마음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두운 터널에 갇힌 듯한 막막함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눈부시던 매장들은 어느새 출구 없는 미로로 바뀌었고, 그 속에서 서윤은 점점 옅어지는 존재감과 함께 깊은 허무에 잠식되어 갔다.


오전에 출근하자마자 수경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잠시 외출을 나온 상태였다. 리온 사무실에는 오늘 안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최희숙 관장은 직원들이 지각을 하거나 자리를 오래 비우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갤러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수경은 느긋한 걸음으로 줄지어 늘어선 진열대들 사이를 오가며 쇼핑에만 몰두했다.


‘도대체 몇 시간째야. 빨리 인사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서윤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 약혼자 태일의 누이인 강수경을 따라다니며, 수행 비서인지 짐꾼인지 모를 처지에 놓여 있었다.


어느 순간, 수경도 손목시계를 힐끔거리는 서윤을 의식한 듯했다. 구찌 매장에서 액세서리를 꺼내 살펴보던 그녀가 갑자기 환히 웃으며 서윤을 돌아보았다.


-서윤 씨, 힘들어? 내가 괜히 바쁜 사람 불러낸 건 아니지?

-아뇨,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서윤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강문태 이사장의 맏딸이자 태일보다 일곱 살 위인 수경은 생모가 집을 떠난 뒤 집안의 안주인 역할을 대신해 온 사람이었다. 강 씨 집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 또한 서윤에게는 이미 몸에 밴 습관이었다.

 

수경은 새로 단장한 샤넬 매장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명품 숍에서는 제품보다도 종업원들의 ‘의례적인 공손함’이 먼저 사람을 압도하곤 한다. 실내를 여유롭게 둘러보던 그녀가 유리 진열장 안의 검은색 가방을 가리켰다.


-여기요, 저것 좀 볼게요.


클래식 미디움은 샤넬의 시그니처 백이자, 이 가게에서 가장 고가의 제품 중 하나였다. 정장을 입은 남자 직원이 흰 장갑을 낀 손으로 가방을 꺼내 수경 앞에 값진 도자기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이 모델은 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는 클래식 아이템입니다. 1955년 코코 샤넬 여사가 디자인한 이후, 변치 않는 상징성을 지닌 작품입니다.


직원의 말투는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했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가방 안을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샤넬 클래식은 검은색 캐비아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내부는 짙은 버건디 색으로 고급스럽게 마감되어 있었다.


수경은 어깨에 걸친 가방의 레더 체인을 살짝 조정하듯 만지며, 거울 너머로 서윤을 주시했다.


-어때? 괜찮아 보여?

-네, 심플하니 괜찮은 것 같아요. 누님이 입고 계신 옷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고요.


서윤은 가급적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대답했다. 그녀 앞에서는 감탄사조차 함부로 흘릴 수 없었다. 수경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천천히 돌아서서 가방을 서윤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순간 서윤의 가슴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얼떨결에 양손을 뒤로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는 이렇게 비싼 백을 들고 다닐 일도 없고…

-서윤 씨가 예뻐서 주는 게 아니야.


수경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싸늘하게 변했고, 날 선 목소리에는 어딘가 위태로운 기색이 숨어 있었다.


-저번에 아버지 생신 파티 때 신발도 그렇고, 백 하나도 변변한 게 없어 보이더라고. 이제 우리 집 식구가 될 텐데, 좀 품위와 격식에 맞게 살아야지. 쇼핑도 패션도, 예의범절까지… 모든 걸 제대로 따라와야 내 동생 체면에 흠이 가지 않지.


수경의 말이 끝나자, 서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가느다란 동요조차 감추듯 두 손을 맞잡고 시선만 아래로 떨구었다. 그날, 강문태 고문의 생일 파티에 갔을 때 신었던 신발은 태일이 백화점에서 직접 골라 준 것이었고, 조신하게 손에 들었던 가방은 뉴욕에 잠시 있을 때 점심값을 아껴가며 마련한 코치 백이었다. 금천 강 씨 집안 행사에 참석하려 강남 미용실에도 다녀왔고, 태일이 원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더 신경을 썼지만, 수경에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부족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나를 자기들 방식대로 바꾸려는 속셈이야. 화폐의 위력으로 내 기를 꺾으려는 거지.’


불판 곁에 다가간 듯, 서윤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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