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하나, 둘, 셋.
그것은 어떤 응답이었을까. 처절한 절규가 멀리 번져갔다가, 낯선 기척으로 되돌아온 것일까. 그 정적 속에서 처음 깨어난 것은 마음을 가로지른 기묘한 예감이었다. 어쩌면 이 우주의 어딘가에는 간절한 소망을 실어 나르는 이름 모를 메신저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때, 절망 끝에서 울려 퍼진 전화벨 소리는 한 줄기 섬광처럼 어둑한 공간을 갈랐고, 깊이 잠들었던 영혼의 시계를 다시 일깨웠다. 그 신호는 유일한 희망이자, 동시에 한 인간의 생애를 산산이 부숴버릴 수도 있는 무자비한 운명의 심판이었다.
태일에게 떠밀리듯 끌려가던 그녀는 익숙한 벨 소리에 순간적으로 발을 멈췄다. 차갑게 식어가던 심장이 다시 고동쳤고, 혼미했던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태일도 전화 소리를 듣고는 잠시 멈춰 섰다. 그 짧은 틈 사이, 그녀는 탈출 본능에 이끌리듯 층계를 휘청이며 내려갔다. 부엌 입구에 무심히 걸려 있던 그 전화기는 이제 한 생명을 붙드는 구원의 징표처럼 빛났다.
그녀는 수화기를 움켜쥐며, 태일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만요. 작품 전시와 관련된 중요한 전화일지도 몰라요.
귓가에 수화기를 가져다 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전화, 이 목소리가 부디 저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들려온 다정한 이름, 살가운 목소리. 제이였다. 그 음성이 그녀 안에서 말라붙었던 무언가를 되살렸다. 눈물이 불쑥 솟구쳤다. 어둠 속에서 가까스로 건져 올린, 마음 깊숙한 곳의 온기 한 조각이었다.
-태일 씨가 또 전화했어. 너랑 통화 안 된다고 난리 치더라.
-청소하다가 전화선이 빠졌나 봐.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지. 얼른 전화해 봐. 걱정하던데.
-태일 씨, 지금 여기 와 있어.
제이의 전화로 가까스로 숨을 돌렸지만, 태일은 여전히 층계 위에서 그녀를 향해 갈증과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내왔다. ‘어서 여기로 돌아와. 우리 비즈니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말은 없었지만, 그의 표정은 위협의 언어로 가득했다.
그녀는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이야기의 잔가지를 뻗어나갔다.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고, 그 방법은 이런저런 수다뿐이었다. 손문기 선생의 초대전을 화제로 꺼내자, 제이도 반가운 듯 대화에 힘을 실었다.
-나도 한번 가 보고 싶어. 너의 스승님이잖아.
-전시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 내가 있을 때 와.
-다음 주 어때? 인사동 그동안 많이 변했지?
-응. 요즘은 전통 등불 콘셉트로 가로등 공사하더라.
-골목길에 맛집도 많이 늘었겠지?
-그럼, 많이 늘었지. 너 부추 넣은 보리 비빔밥 좋아하잖아.
-이번에는 고모네 삼합 어때?
-좋지. ‘가을 나그네’도 가자. 내가 딸기빙수 살게.
-와, 신난다. 히히.
그 순간, 위층에서 난간을 두드리는 쿵쿵 소리가 터져나왔다. 태일이었다. 서윤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등을 돌렸다.
태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층계를 내려왔다. 쓰레기봉투를 집어 드는 그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문짝에 화풀이라도 하듯 쾅 닫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쓰레기를 처리하고 돌아왔을 때, 서윤의 눈가는 이미 눈물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급히 화장실로 몸을 피하고는 찬물로 얼굴을 적셨다.
-짐 다 꾸렸어? 더 챙길 거 있으면 말해. 차에 실어 줄게.
-거기 문 옆에 있는 배낭이 다예요. 어서 차로 가서 기다려 주세요.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채, 그녀는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관문이 닫히고 그의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찬물로 얼굴을 식히며 그녀는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슬렀다.
별장을 떠나기 전, 실내를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도착 당시의 설렘과 충만하던 감각은 자취를 감추고, 짙은 불안과 뒤엉킨 감정의 잔향만이 허공을 떠돌았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어쩌면 그녀 자신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 거울 속 얼굴은 분명 그대로였지만, 그 눈빛에는 낯선 계절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