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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태일의 시선이 쓰레기 봉지 속을 훑는 동안, 서윤은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처럼, 싸늘한 공포가 목구멍 깊숙이 차올랐다.


일부러 박박 구겨놓은 듯한 그 종이가 유독 태일의 눈에 띄었다. 결국 태일의 손끝에서 그 노트 종이가 딸려 나왔다. 그는 구겨진 종이를 펴더니, 그 위에 적힌 숫자들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네?

-누구 번호야? 이건 나서윤의 글씨체가 아닌데.


서윤의 얼굴빛이 삽시간에 하얗게 변했다.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바르르 떨렸다.


-전, 전시회에 관련된 작가 전화번호예요. 명… 명희 씨, 잘 아시죠?

-명명희? 알지. 우리 집에도 그림 몇 점 있잖아. 남미 여행 중 그린 거랑,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전시했던 것도 있지.

-맞아요. 이번에 초대전을 기획 중이에요. 혹시 후원하실 생각 있어요?


태일은 서윤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불편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렇군. 나도 명명희 씨 팬이니 기꺼이 돕지.


그는 구겨진 노트 종이를 다시 쓰레기봉투 속에 넣고, 봉투째 손으로 꽉 비틀었다.


-리온에 전화했더니 화요일부터 휴가라던데, 왜 나한테는 출근한다고 거짓말한 거야?


태일의 목소리에는 의심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갤러리 일정이 갑자기 바뀌었어요. 돌아가는 길에 명 선생님을 찾아뵈려고요.

-오늘?

-아니, 내일 뵈면 되죠. 그래서 휴가를 받은 거예요.

-그런데 전화는 왜 안 받았어? 통화만 됐어도 내가 이렇게 바쁜 와중에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미안해요. 청소하다가 전화선이 빠진 줄도 몰랐어요.


서윤은 어색하게 말을 더듬었다. 입안이 메말라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태일은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더니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시 그녀를 향해 불쑥 손을 뻗어왔다. 어색하게 몸을 사리는 그녀를, 그는 노련한 종마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쨌든 거짓말 한 벌은 받아야지? 안 그래?


그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끈적거리는 숨결을 그녀에게 불어넣었다. 손끝이 닿는 자리마다 피부는 긴장으로 굳어졌고, 뼛속 깊이 불쾌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그 깊고 흐릿한 감정의 틈새로, 도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녀는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쉰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아… 안 돼요. 턱이 아파서 그래요.


상처 난 턱을 손으로 감싸며 한 발 물러선 그녀의 눈빛에는, 태일이 끝내 읽어내지 못한 불신과 원망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남자 마음을 그렇게 몰라? 너 때문에 내가 새벽부터 장거리 운전했잖아.


태일은 잠시 주춤했지만, 오늘따라 더욱 집요하게 굴었다.


-침대에 가서 좀 쉬자, 피곤을 풀어야지. 잠깐만이라도.


자신을 한낱 피로를 풀기 위한 도구쯤으로 여기는 뻔뻔함이, 그의 말투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온몸이 떨렸다.


‘미쳤어… 제발, 나한테서 떨어져.’


그녀는 다시 뒷걸음질했지만 태일은 사냥에 나선 짐승처럼 서서히 간격을 좁혀왔다. 그 눈빛엔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광기가 번뜩였다. 한 발, 또 한 발 뒤로 물러설수록 벼랑 끝이 가까워지는 듯했다. 한 남자의 폭력 앞에 굴복해야 한다는 현실이 폐쇄된 어둠 속으로 그녀를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


‘도망쳐야 해. 이 더러운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해.’


이를 악물며 속으로 외쳤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아야 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를 지켜내야만 했다. 숨결보다도 가느다란 희망 하나를 붙잡고, 서윤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하느님, 제발.’


그 순간, 시간마저 숨을 죽이고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지만, 세상은 끝없는 정적 속으로 잠겨 들었다. 한없는 어둠 속,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손끝으로 붙든 무언의 기도는 끝내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없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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