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현관 열쇠를 꽉 움켜쥐었다. 도준의 차가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숨통을 점점 조여왔다. 서둘러 배낭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서려던 순간, 돌층계를 단숨에 뛰어 올라온 태일이 초인종을 거세게 눌러댔다. 그녀는 피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턱은 그게 무슨 꼴이야? 어쩌다 다친 거야?


집 안으로 들어선 태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게… 자전거 타다 넘어졌어요.

-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이 얼굴로 어떻게 사람들 앞에 나설 생각이야?


태일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무슨 모임이요?

-저녁에 아버지 생신 파티가 있어. 금천 강 씨 집안에선 공식 행사나 다름없는 날이지. 아버지가 당신을 친척들한테 소개하실 거야.


태일은 손을 내저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 얼굴 어쩔 거야. 우리 집안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신우건설의 강문태 고문은 권위와 겉치레, 가문과 혈통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자본과 권력은 혈연과 지연, 정략적 관계를 통해 치밀하게 축적되는 것이었고, 기성세대의 위신과 위계질서는 그 어떤 의심도 허용되지 않는 불가침의 체계였다.


강문태에게 서윤은 결코 아들의 배필로 적합하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를 중시하는 그의 눈에 서윤은 턱없이 부족해 보였고, 아들이 그런 평범한 여자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 도무지 달갑지 않았다.

아들의 간청에 약혼은 어쩔 수 없이 승낙했으나, 그 인연이 결국 오래가지 못할 거라 여기며 결혼식을 계속 미룬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약혼식을 치른 지 벌써 일 년하고도 육 개월이 지났건만 서윤을 향한 강문태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고 의심으로 가득했다. 무심한 듯, 가끔 한마디씩 던지는 독화살 같은 말들은 서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았다.


-넌 얼굴에 그늘이 너무 많아. 젊은 애가 왜 그런 표정이니? 누가 죽기라도 한 거야?


-여자라면 싹싹하고 사근사근한 맛이라도 있어야지. 너처럼 울상은 곤란해. 없는 복도 달아난다니까.


실상 그는 이미 한 재력가의 외동딸을 아들의 배필로 점찍어두었고, 그 결합이 가져올 막대한 이익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2년 전, 서윤이 짐바브웨 쇼나 조각상을 성북동 집에 배달하지 않았더라면, 태일은 지금쯤 아버지가 택한 여자와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약혼 이후, 강문태 고문은 집안의 각종 행사에서 서윤을 배제하며 그녀를 의미 없는 존재로 취급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태일에게 직접 그녀를 데려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마침내 정식 며느리로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러나 오늘 밤 생일 파티에서 강 씨 일문 앞에 서야 한다는 중압감보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 서윤의 마음을 훨씬 더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아래 공터에 도준의 차가 멈춰 서고, 그가 현관문 앞까지 자신을 데리러 올라올 것만 같았다. 어쨌거나 두 남자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상황만은 피해야 했다. 태일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집 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는 항상 눈치가 빠르고 직관이 예리한 남자였다.


서윤의 머릿속에서 압력밥솥 꼭지가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온도계의 수은주가 치솟았다. 공기 입자의 밀도가 임계치에 도달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태일은 정반대 방향으로 몸을 기울였다. 불시에 그녀를 끌어당겨 거칠게 입술을 덮쳤다. 화들짝 놀란 서윤은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쳐냈다. 황급히 돌아서서 테이블 주변을 정리하는 척 몸을 피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고, 목소리는 메마른 톤으로 갈라졌다.


-아,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거예요? 제 기분도 좀… 생각해 주세요.

-뭐야? 이건 좀 섭섭한데.

-중요한 행사라니 서둘러야겠네요. 거의 다 준비됐어요. 아, 쓰레기통을 안 비웠네요. 태일 씨가 제 짐을 들고 차에 가서 기다리세요. 금방 나갈게요.

-쓰레기 정도는 내가 버려줄 수도 있어. 얼른 마저 준비해.


태일이 부엌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어젯밤 서윤이 초록색 노트에서 찢어낸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도준이 전화번호를 적어 준,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 메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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