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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고모와 고모부가 한 시대를 살았던 그 집의 뒷마당에는 외양간을 개조한 작은 창고가 하나 있었다. 각종 농기구와 오래된 잡동사니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는 곳이었다.


그날 밤, 도준의 그림자가 창고 안 선반 사이에서 한동안 이리저리 움직였다. 구석구석 쌓여 있는 상자와 보따리들을 들출 때마다 손끝에서 먼지가 흩어졌다. 그는 바스러질 듯 삭은 상자들을 하나씩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분명 여기 어디에 있을 텐데…


어둠 속을 오가던 손전등의 노란 불빛이 마침내 선반 구석의 작은 상자 앞에서 멈췄다. 조심스레 상자 뚜껑을 연 도준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찾았다. 여기 있었네.


상자 안에는 어린이용 분홍신 한 짝이 놓여 있었다. 오래전 그 여름의 햇살과 바람, 어린 서윤의 발자국을 그대로 담고 있는 신발 한 짝. 도준은 그 작은 샌들을 집어 들며 미소 지었다.


- 고모가 이런 걸 버릴 리 없지.


오래전, 용천 계곡에서 마주쳤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떠내려가는 신발을 좇다 물살에 휘말린 작은 몸, 급류 속에서 끌어올린 아이는 젖은 종잇장처럼 가벼웠고, 그의 셔츠를 꼭 붙든 손은 유백색 꽃잎처럼 창백했다. 그 차갑고 여린 감촉이 아직도 그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이번엔 내가 구했어.

소년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며칠 뒤, 도준은 계곡 아래에서 물살에 떠밀려온 분홍신 한 짝을 발견했다. 소녀는 이미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간 뒤였다. 도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 집을 나와 기숙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날은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도준이 짐을 싸고 있을 때, 고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속옷과 밑반찬을 챙겨 주던 고모의 시선이 책꽂이로 향했다. 거기에는 분홍신 한 짝이 놓여 있었다. 고모에게 그것은 이 방 안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퍼즐 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저거 뭐야? 웬 샌들을 모셔둔 거야?

-새 신발이잖아요. 나중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해요.

-아주 작은데? 누가 주인인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저 여기 없다고, 제 물건 막 버리진 마세요.


도준은 왠지 시무룩해 보였다.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 속에 불안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집을 떠나기 싫어 그런 것이라 생각한 고모는 어린 조카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


-괜찮아. 금방 방학하면 또 볼 텐데. 우리 준이, 잘할 수 있을 거야. 힘들면 바로 연락하고. 이 고모가 당장 쫓아가서 해결해 줄 테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그해 여름, 용천 계곡에서 제짝을 잃어버린 그 분홍신 한 짝은 도준이 기숙학교로 떠난 뒤 줄곧 이 창고 안에서 잠들어 있었고, 수많은 사연과 수수께끼 같은 세월을 지난 끝에, 마침내 오늘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제 분홍색 샌들은 진짜 주인을 향한 길목에 놓여 있었다. 오래전에 묶인 매듭 하나가 스르르 풀리려는 중이었다.


이 샌들을 돌려주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어떤 말로 그날 있었던 익사 사고에 관해 설명해야 할지, 우리의 인연이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기적 같은 우연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릴 뿐이었다.


그녀가 벌써 약혼을 했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머리 한쪽에서는 그녀와의 인연이 내일까지겠구나 싶으면서도, 세상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게 중요한 거지.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를 로체 남벽 등정을 앞두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것, 어쩌면 그 자체로 기이한 일일 수도 있었다.


도준이 신발 상자를 들고 창고에서 나오자, 집 내실 쪽에서 희미하게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그는 장독대 앞을 지나 대청마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혹시 청소 용역회사 대표인 최윤 선배일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다. 도준이 댓돌 위에서 신발을 벗으며 손을 막 뻗으려는 순간, 벨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묵직한 캔디바 형태의 노키아 폰을 집어 들고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어이쿠, 전화했으면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 안 받으면 또 걸겠지.

하지만 벨 소리는 끝내 다시 울리지 않았다. 당시는 방금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도준은 그 전화가 서윤에게서 온 거라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 보지만, 그날 밤 전화가 연결되었더라면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 분홍신 한 짝은 단순한 추억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제 분신의 또 다른 한 짝을 향한 인연의 닻줄이자, 먼 여정을 품은 상징적 매개체였다. 하지만 그 신발을 찾느라 창고에서 시간을 지체한 탓에 결국 그녀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분홍신은 어쩌면 두 사람을 두고 벌이는 얄궂은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도준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손에 들고 있는 신발 상자만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내일 낚시터에서 물고기를 잡는 동안, 깜짝 선물처럼 이 분홍신을 건넬 수 있으리라.

-이 신발이 오랫동안 우리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낭만적이고도 의미심장한 한마디쯤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물에 대한 두려움은 그날 익사 사고가 남긴 깊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더는 물에 빠지는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때의 진실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용천 계곡의 개울가에서 시작된 인연은 스물두 해를 넘어 다시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녀와의 두 번째 입맞춤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것이 아닐까.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한 상태라 해도, 그들의 관계는 어떤 현실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분홍신 한 짝은 두 사람의 운명이 오래전부터 서로를 향해 뻗어 있음을 보여주는 작고 소중한 증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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