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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밤이 깊어가자 별장 주변은 짙은 물감이 뿌려진 푸른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습관처럼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느새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작업에 몰두할 때도, 뜨거운 녹차를 홀짝일 때도 마음 한 가닥은 늘 창밖 어둠에 닿아 있었다.


어수선한 심정으로 욕실 거울 앞에서 이를 닦고 있는데, 갑작스레 전화벨이 울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설렘이 밀려왔다. 도준의 구릿빛 얼굴과 그 짜릿한 입맞춤이 가슴을 조이듯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제이였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숨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전화 받으려고 뛰어왔어. 근데, 무슨 일이야?


서윤은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늘 서울 온다더니, 왜 거기 있는 거야?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뜻이지.


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일? 지붕 공사 대금은 오늘 준다며.

-그게 다야. 빨리 말해. 지금 전시 기획안 정리 중이니까.

-거기서도 일해? 좀 쉬어라, 쯧쯧.

-제발 말해. 무슨 일이냐고.

-태일 씨가 너 어디 있냐고 전화했어.

-혹시 나 횡계 갔다고 했어? 그러지 말지.

-참! 휴가받았다는 말 안 했다고 했지? 근데 그 남자, 좀 이상해. 자기 약혼녀가 서울에 없다는데 왜 나한테 짜증을 내?

-그 사람 원래 말투가 그래.

-그럼 너는 그 짜증을 매번 받아 주는 거야?

-그건 아니야… 미안. 대신 사과할게.

-어쨌든, 난 그 남자 밥맛이야. 완전 재수탱이야.


제이가 태일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서윤이 그와 데이트를 시작했을 때부터 툴툴거리며 쓴소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녀가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서울로 돌아갈 거라고 하자, 제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조건 우리 사무실로 와. 불금이잖아. 닭꼬치에 생맥 하나씩은 해야지.

-알았어. 가능하면 들를게.


전화를 끊고 나자, 공허함이 밀려왔다. 한 주는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고, 휴가가 별다른 성과 없이 허무하게 끝나가는 듯해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녀는 잠시 거실을 서성이다가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파일을 열고 작업을 시작했지만, 정신은 이미 화면 밖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깜빡이는 커서는 밤의 어둠 속에서 점멸하는 불빛처럼 눈을 찔렀고, 숫자와 문장들은 행간 속에서 부유하는 암호처럼 의미를 잃었다.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손을 멈췄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와 화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노트북을 쾅 닫았다.


도준.


이미 결혼할 사람이 있는 여자가, 낯선 남자에게 이토록 끌려도 되는 걸까. ‘정신 나갔어. 뭐 하는 짓이야. 이렇게 한순간에 흔들리다니…’ 그러나 생각은 마법의 콩나물처럼 끝없이 자라났다. 지우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들. 불면증 환자가 잠들기 위해 잠을 내려놓아야 하듯, 강박증 환자가 생각의 루프에서 벗어나려면 그 생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녀도 이 뒤숭숭한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그 안쪽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작은 파동이 꿈틀거렸다.


도준.


손등을 스치던 그의 손길, 귓가에 느껴지던 따뜻한 숨결, 느릿하게 퍼져 가던 낮은 목소리. 모든 순간이 가슴 저릴 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그의 얼굴은 흐릿했다. 눈과 코, 입의 생김새를 떠올리려 애쓸수록, 뿌연 목탄화처럼 희미한 윤곽만 남았다.


그녀는 이층 침실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해 보았지만, 의식은 오히려 더욱 명징하게 깨어났다. 흩어진 이미지들이 만화경 속 유리 조각처럼 어지럽게 맴돌았다. 기억과 감각이 뒤엉킨 혼돈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가눌 수 없었다.


-어머, 이게 뭐야? 미친 거야? 나 정말 진심인 거지?


무대 위에서 독백을 쏟아내는 배우처럼, 그녀는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차분히 누워 있는 일조차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집 안을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했다. 층계를 내려가 거실과 손님방을 휙 둘러보고, 화장실 문을 밀어젖힌 뒤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 침대 매트리스에 몸을 던지며 허공을 향해 두 발을 마구 차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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