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그가 다가와 테이블 위의 펜을 집었다.


–제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며칠은 더 고모부 댁에 있을 예정인데, 그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뭐든 도와드릴게요. 정말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마땅한 메모지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초록색 스프링 노트를 펼쳐 여백을 내밀었다. 그는 약간 비스듬한 필체로 휴대폰 번호 열 자리를 또박또박 적었다.


–아직 통성명도 못 했군요. 저는 도준입니다.

–아... 저는 나서윤이에요.

–서윤...


그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입 안에서 굴렸다.

 

–이름이 참 곱네요. 무슨 뜻인가요?

–빛나다, 윤이 나다, 그런 뜻이에요.
–그렇군요.

그의 눈가에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

–당신 이름은 햇살이 비치는 물결 같네요. 고요하면서도 반짝이는.

그의 표정에도 잔잔한 빛의 파장이 일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던 이름이었다. 용천 계곡, 젖은 몸으로 바위 위에 누워 있던 어린 소녀.


‘서윤아!’


그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던 사람들의 발소리. 그러나 지금, 그 이름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자,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애수에 가까운 울림이 되어 가슴 깊은 곳에서 공명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서로를 바라보던 영원처럼 짧은 침묵.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스물두 해 전, 계곡물에 빠진 소녀의 폐에 생명을 불어넣던 그날의 입맞춤이 ‘처음’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은 모든 세월을 지나 도달한 진정한 의미의 첫 키스였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순간 당황했지만, 몸을 돌리거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불안과 욕망이 뒤섞인 이마 위로 열이 올라왔고,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의 입맞춤은 달콤하면서도 아릿했고,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뿌연 열기가 차오르듯 번졌다. 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떨림이 부끄러울 만큼 분명하게 온몸을 감쌌다. 몸은 환희에 젖어 있었고, 마음은 여전히 불확실한 파동 속에 흔들렸다. 시곗바늘이 멈춘 듯,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내 내면을 스치는 한 줄기 속삭임이 들려왔다. 약혼자, 결혼, 가족의 기대와 책임. 빛바랜 그림자들이 다시 의식을 덮쳤다. 이 키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가장 깊은 곳에서 번지는 불꽃의 정체는 무엇인지. 자유를 향한 갈망과 두려움이 엇갈리며 그녀의 마음을 격렬하게 뒤흔들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려 했다. 가슴 깊이 그녀를 품으려 했다. 숨결과 숨결이 맞닿은 순간,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쳐냈다. 이것이 반사적인 방어 동작이었는지,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깐만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사실… 저는 약혼자가 있어요. 그러니까, 곧 결혼한다는 의미예요.

그녀의 말들이 얼음송곳처럼 하나씩 도준의 가슴에 꽂혔다. 도준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고통과 혼란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억지로라도 참아보려 애쓰는 마음 한편에 상실감과 번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그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렸더라면, 오빠의 사진을 보고 ‘부군이냐’고 물었을 때 바로 약혼 사실을 털어놓았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과 스스로를 배반한 불찰이 한없이 크게 느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해합니다. 저는 그냥 당신에게 끌렸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그러니 제가 미안합니다. 너무 제 감정에만 솔직했나 봅니다.


그 짧은 고백 사이로 공기마저 숨 막히게 떨려왔다. 심장은 불현듯 요동쳤고,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숨을 고르더니, 신중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저기…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낚시하러 가실래요? 반나절이면 충분해요.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다른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눈빛 어디에도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진심이 그녀의 가슴에 파문처럼 번져왔다.


내일은 금요일이었다. 그가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오전에 낚시터에 잠시 다녀온 뒤 오후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아마도 오늘의 해프닝을 핑계 삼아 조금이라도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와 이렇게 끝내야 한다는 사실은 말로 다 담기 어려운 쓸쓸함으로 그녀의 마음을 옥죄었다. 자신도 모르게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 듯한 안타까움이 가슴 한편에 자리했다.

평소 같았다면 그녀는 쉽게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며 누구에게나 한두 번은 견딜 수 없이 강렬한 무언가가 휘몰아치는 순간이 있다. 그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 앞에 선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아가거나, 끝내 외면하고 돌아서거나. 결국 그 감정의 무게와 책임은 공평하게 각자의 몫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좋아요. 낚시터에 갈게요. 오후에는 반드시 서울로 돌아가야 해요.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열 시쯤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의 이마에 마지막 입맞춤을 남기고 말없이 현관문을 닫고 떠났다. 돌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저녁 공기 속으로 희미해졌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대고, 어스름이 내려앉은 바깥 풍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석양을 등진 그의 랜드로버는 붉은 후미등을 밝힌 채 저무는 빛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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