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여긴 전망이 좋군요. 그런데 저기… 저 나무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요.
도준이 창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별장 아래쪽 비탈에는 군데군데 수피가 벗겨지고 잔가지가 축 늘어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대추나무예요. 가을이면 알 굵은 대추를 한 바구니씩 따곤 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저 모양이에요.
-병이 든 걸까요?
-그럴지도요.
저무는 햇살 아래, 오랜 세월을 떠받치다 지친 기둥처럼 고개를 숙인 대추나무가 애잔하게 느껴졌다. 큰할머니가 살았을 때부터 늘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나무가 이제 한 시절의 마지막을 향해 다가가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무도 외로움을 탈까요?
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 쪽으로 옮겨졌다.
-외로움이요?
-그냥… 저 나무도 혼자 집 지키는 게 싫어서 저렇게 된 건가 싶어요. 나무도… 외로울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낯선 게 아니었다. 늘 혼자 길을 걷고, 홀로 머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던 그의 삶에서 외로움은 견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 몸에 익은 감각에 가까웠다. 그러나 서윤의 목소리에 실린 그 말은 조금 달랐다. 나무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어딘가 사람의 것이었다. 설명되지 않은 채 오래 억눌려 있던 무엇인가가 불현듯 새어 나온 듯했다. 도준은 그 말의 의미를 쉽게 흘려들을 수 없었다.
-여긴 아버지 고향 같은 곳이에요. 저도 머리가 복잡할 때면 여기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최근엔 너무 바빠서 못 왔지만요.
도준이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
-머리가 복잡해요? 왜요?
말투는 무심한 듯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그녀가 또다시 자신을 열어 보일지 모른다는 기대가 숨어 있었다.
-그냥, 뭐… 가끔요. 일을 하다 보면 그렇죠.
-그럴 때 저는 강태공처럼 낚시를 합니다. 곧은 바늘을 물 위에 드리워놓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잡념이 사라져요. 낚시는 마음을 다스려주죠.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는 낚시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배어 있었다.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낚싯줄을 드리운 채 무념무상에 잠긴 한 낚시꾼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그의 시선은 어디 먼 곳에 닿아 있는 듯 아득했고, 일상의 굴레로부터 한 발 비켜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낚시’라는 단어 하나가 불러낸 물가의 풍경은 그녀에게 낭만이 아니라, 가늠하기 힘든 막연한 불안을 안겨주었다.
-혹시 낚시 좋아하세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뇨.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왜요?
-물 공포증이 있어요. 왜 그런지, 물에 빠지는 악몽을 자주 꿨거든요.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과거의 어둠과 그 순간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는 그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일을 간직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요즘도 그런 악몽을 꾸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제 친구는 높은 계단에서 떨어지는 꿈을 자주 꿔요. 저는 계속 물에 빠지는 꿈이죠. 참 이상한 일이에요.
그는 잠시 말을 고르듯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꿈에는, 어쩌면 감춰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죠. 때로는 무의식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일 수도 있고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소를 띠었다.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아, 잠깐만요.
주전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빨리 불을 끄고 두 개의 머그잔에 물을 부었다.
-저는 진한 커피를 좋아해요. 그 독특한 향 때문이죠.
-아, 그렇군요.
그녀는 코끼리 문양이 그려진 그의 머그잔에 커피를 반 스푼 더 떠 넣었다.
-컵이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머그잔을 건네려고 하자, 그가 컵 위쪽을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다. 그 동작은 마치 그녀의 손을 덥석 잡는 것처럼 느껴졌고, 손끝이 스친 순간 짧고 날 선 감각이 심장을 관통했다. 그녀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그 낯뜨거운 욕망이라는 걸까.’
귓불이 화끈 달아오르자, 그녀는 시선을 피한 채 몸을 조금 옆으로 틀었다.
그는 커피를 후후 불면서도 연거푸 마셨다. 뜨거운 커피도 거뜬히 넘기는 모습에 그녀는 점점 더 깊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가 손목에 찬 크고 두툼한 시계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이건 무슨 시계예요?
-아, 이거요? 아보셋 제품이에요. 고도계 시계라고도 하죠.
그가 손목시계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여러 숫자와 표시가 얽힌 화면은 꽤 복잡해 보였다. 높은 산에서 기압과 고도를 재기에 좋고, 약 1만 8천 미터까지 측정이 가능하며 하루에 몇 번 스키 리프트를 탔는지도 알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 설명을 듣고도 서윤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실례지만, 뭐 하시는 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저는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고요한 실내에 잔물결처럼 번져갔다.
-세계 곳곳을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녔죠.
그는 그간의 경험을 떠올리듯 미소를 띤 채, 극지 탐험과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히말라야 고산 원정에 얽힌 이야기를 몇 마디 들려주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표정에는 엷은 향수와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제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거리를 자전거로 달렸다면 십 년 이상 걸렸을 겁니다. 두 발로 걸었다면 평생 걸렸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삼 년뿐이었어요. 뜻밖의 기회였죠. 우연히 독일 자동차 회사와 인연이 닿아, 특수 제작된 차량과 비용을 지원받았어요. 여행하며 극한 환경에서 배터리 성능을 시험했고, 그 결과를 연구소에 전했지요.
-어머, 정말요? 놀라운 이야기예요.
그녀의 눈동자가 신기함과 경이로움으로 반짝였다. 극지의 빙원과 아프리카 오지, 그리고 미지의 땅을 떠돌던 그의 이야기는 그녀로 하여금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의 궤적과 그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