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차 안은 차체의 겉모습보다 훨씬 더 낡아, 오래된 유물처럼 빛이 바래져 있었다. 핸들은 손때가 겹겹이 스며든 가죽 위로 번들거렸고, 변속기 너머로는 세월이 남긴 자국이 부드럽게 패여 있었다. 이름 모를 시간이 묻어난 시트는, 옛이야기의 숨결인 듯 묘하게 따스함을 풍겼다. 자동차의 라디오는 침묵했지만, 금방이라도 바스락거리는 재즈의 잔향이 번져올 것만 같았다. 


서윤은 이 차가 오래도록 품어온 정서의 무게를 어렴풋이 감지했다. 어쩌면 이 차는 시간이 머물렀다 간 자리이자, 사라진 기억의 흔적들을 감싸안은 쉼터일지도 몰랐다.


-자, 출발합니다.


도준이 웃으며 말했다.


-네.


그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숨을 삼켰다. 밀폐된 공간에서 낯선 남자와 단둘이 앉아 있다는 생각만으로 불안이 스며들었다. 차 안의 정적은 숨소리조차 울리는 듯 어색했고, 약혼자가 있는 몸으로 낯선 남자의 차에 올라탔다는 사실이 자책처럼 가슴을 조여왔다.


강태일이 이런 상황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싸늘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경멸 어린 입술 위로 번지는 비웃음. 심지어 침이라도 내뱉을 듯한 그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도준은 단 한 번도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운전대를 단단히 쥔 채 숲속 비포장길만 응시하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이상하리만치 여유롭고 안정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앞만 바라보는 그 모습은 얼마간 서윤을 안심시키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를 의식하지 않는 거야… 근데 내가 그렇게 매력 없는 여자인가?’


서윤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런 유치한 생각을 떠올린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무심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조금 서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쩐지 궁금하고 자꾸 신경이 쓰였다.


서윤의 마음이 조금 진정될 무렵, 차가 크게 덜컹거리는 지점을 지나자 오솔길은 점점 좁아졌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에 보리암을 가리키는 작은 표지판이, 숲 그림자 속에서 한 가닥 흐릿한 실루엣처럼 드러났다.


-저기서 좌측으로 가시면 돼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그맣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 위에 있는 파란 지붕 집이죠?


도준이 가볍게 웃었다.


-네?


서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그렇게 말했잖아요.

-아, 그렇죠, 참!


서윤은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도준이 핸들을 왼쪽으로 꺾자 엔진이 낮게 웅웅대더니, 랜드로버는 울창한 잡목 숲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른 실개천 같은 고랑을 지날 때는 차체가 더욱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도준이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뻗어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지 않게 받쳐 주었다.


서윤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잡이를 붙잡으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도준의 손이 다시 운전대로 돌아가자, 낯설고 무방비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며 손끝까지 번졌다. 차 안의 정적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도움을 받는 처지에서 계속 침묵만 지키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했다.


-굉장히 오래된 차네요.


서윤은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놀란 듯 돌아보았고,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74년형이에요. 곧 폐차될 운명이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굴러가죠.


남자의 말투에는 담담함 속에 묘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대학교 때 이거랑 비슷한 차를 타고 다니던 교수님이 계셨어요.

-그 교수님 차도 이렇게 고물이었나 보죠?

-아니, 이 차가 고물이라는 얘기는 아니고요…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냥 농담한 거예요.

-아, 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반사되어 속눈썹 아래에 투명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모습을 바라본 순간, 도준의 눈에도 기억의 잔상이 스쳤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감정 하나가, 마치 신호를 받은 듯 서서히 깨어났다. 그녀는 작은 기척에도 놀라 금세 상처받을 것 같은 예민한 생명체처럼 보였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고, 촉촉한 눈빛은 작은 몸짓에도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도준은 친근하게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일부러 꾹 참았다. 성급한 말 한마디로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 용천 계곡에서 처음 만난 조그만 여자아이가 이렇게 성숙하게 자라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제 고무부 집 마당에서 홀로 서 있던 그녀를 보았을 때,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익숙한 끌림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예감된 재회처럼, 가슴 한가운데 작은 등불이 켜졌다. 그 짧은 순간, 지난 세월이 한 점으로 응축되며, 오랜 인연의 끈이 불쑥 당겨지는 듯했다.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의 접점 같았다. 험준한 봉우리와 절벽을 전전하며 살아온 도준의 세계와, 무르고 따스한 그녀의 세계가 초봄의 투명한 바람 속에서 잠시 포개졌다. 도준은 자신과 서윤이 이토록 오랜 세월 인연을 이어왔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는 매 순간 치열한 경험과 도전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왔고, 때로는 벼랑 끝에서 생사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서윤은 그런 극단적인 세계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부서질 듯 가냘프고 깨끗하며 순수한 분위기는 사람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지만, 동시에 그녀만의 선명한 존재감이 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흘러간 날들 속에서도 변치 않은 기억 하나가 가슴 깊은 곳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불현듯, 서윤이라는 여인의 내면과 그녀가 지나온 계절들이 궁금했다. 마치 자신이 놓치고 살아온 어떤 빛의 조각 위에 살며시 손을 올려 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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