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도준이 조심스럽게 차를 옆으로 붙이며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자전거에 문제라도 생겼나요?


나지막하면서도 묵직한 그의 목소리에 서윤은 움찔했다. 그녀는 자전거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옆을 돌아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평소와 다르게 입술 끝이 살짝 떨리고, 불편한 기색이 감돌았다. 방금 땅바닥과 씨름이라도 한 듯한 자신의 모습이 민망했고, 이런 쑥스러운 순간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지?’


인적 드문 외딴 숲길에서 생판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마주한 상황은 묘하게 꺼림칙했다. 전날에도 그는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있던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오늘도 그랬다. 울타리 하나 없이 누구에게나 개방된 야외 공간이지만, 이 깊은 숲 한가운데서 낯선 이와 다시 마주쳤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은연중에 간절히 빌고 있었다.


‘어서 가세요. 그냥 모른 척 지나가 주세요. 제발.’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뭐야, 저 눈빛?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서윤은 바퀴가 터진 자전거를 억지로 끌며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지쳐 있었지만, 가능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균형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다시 차를 옆으로 붙였다.


-괜찮으세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아뇨. 괜찮아요. 그냥 가세요… 앗!


서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턱에 난 상처가 소금을 뿌린 듯 화끈거리며 몹시 따가웠다.


-잠깐만요.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요.


남자가 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오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자전거 타다가 넘어진 거예요?

-괜찮아요.


남자의 호의를 밀어내듯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긴요. 턱에 흙이 잔뜩 묻었어요. 우선 상처부터 좀 씻어내야겠네요.


그녀의 눈동자에는 경계하는 빛이 어른거렸다.


남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차로 가서 생수병과 휴대용 티슈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먼저 입안을 헹군 뒤, 그가 따라주는 물을 손바닥에 받아 턱 주변을 닦았다. 찬물이 상처를 스치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많이 쓰라려요?


도준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자전거 헬멧은 왜 안 쓰셨어요?


그의 목소리는 온화하지만 단호했다.


-여기 그런 데잖아요. 혼자 천천히 타는 건데… 굳이 그렇게 눈에 띄고 싶진 않아서요.


부어오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거북하게 울렸다. 자기 귀에도 낯설게 들리는 음성에, 순간 입안 어딘가 크게 다친 것은 아닐지 불안이 치밀었다.


-혼자일수록 더 조심하셔야죠. 자전거 사고도 자동차 사고 못지않게 위험하거든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아요. 정말로요.


서윤은 손을 내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거절의 제스처는 분명했지만, 눈빛에 미세한 망설임이 어렴풋이 비쳤다. 도준은 시선을 옮겨 펑크 난 자전거 바퀴를 가리켰다.


-이걸 혼자 끌고 갈 수 있겠어요?

-뭐, 그냥…

-이런 길에, 혼자서요?

-아니, 그러니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기엔 자신이 없었고, 도와달라 하기엔 자존심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냥 가라고 하시면,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도준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차로 향하는 걸음은 서두르지 않았다. 한 발씩 멀어지면서도, 그 뒷모습에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여유가 묻어났다.


-잠깐, 저기요!


서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쫓아갔다.


-도, 도와주는 김에 좀… 끝까지 부탁드릴게요.


조금 숨이 찬 말투였지만,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도준은 천천히 돌아섰다. 눈빛은 조금 전보다 깊어져 있었고,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떠올랐다.


-흠, 이 정도면 인연이네요. 먼저 자전거부터 실을게요.

-네? 어제는 운명이라더니, 오늘은 또 무슨 인연… 이에요?

-어제요?

-할아버지네 집 마당에서요.


도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아, 제가 잠깐 착각했나 봐요.


서윤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뭐… 그냥…


말끝이 흐려지자, 도준이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이라니요. 이런 것도 인연인데.


서로의 눈빛이 잠깐 맞닿았다. 긴장과 웃음, 약간의 부끄러움이 뒤섞인 순간이었다. 봄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숲길을 스치며,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한 침묵을 흔들어 놓았다.


도준은 멋쩍게 웃으며 자전거 앞으로 다가갔다. 앞바퀴를 분리하는 그의 손놀림에는, 도구를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 특유의 침착함과 신중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유아용 자전거라도 되는 양 가뿐히 들어 짐칸에 싣고,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자, 타세요.


서윤은 문득 멈칫했다. 도움을 받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낯선 남자의 차에 올라탄다는 건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어제 잠시 스쳤던 김 씨 할아버지 댁 마당에서의 불안이 되살아났다. 마음 한편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본능적으로 어깨가 굳어졌다. 숲길 양옆을 살피며 되돌아설 길을 찾았지만, 다른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남자, 그리고 고요한 숲만이 고립된 현실 속에 남아 있었다.


‘김 씨 할아버지 조카라잖아.’


그 순간, 우연히 찾아온 작은 일탈에 그녀는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을 느꼈을까. 아니면 불안하기만 했던 걸까. 그 불안 너머에, 은근히 스며드는 설렘도 있었을까.


소리와 기척이 사라진 오후의 숲길에서, 서윤은 그의 부축에 살짝 기대어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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