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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서윤이 자전거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뉴욕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뉴저지 포트 리의 작은 가게 위층 원룸에서 지내며, 혼잡한 버스 대신 자전거로 맨해튼까지 통학했다. 거의 1년 가까이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 허드슨강의 바람을 맞으며 질주했던 그 경험은 몸에 깊이 각인되었고, 이제는 횡계의 숲길 정도는 무리 없이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한동안 2차선 차도를 따라 달리던 서윤은 인가를 벗어나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덜컹거리는 길 위로 엷은 햇살이 부서졌다. 사람의 발길마저 드문 구불구불한 길 끝에는 완만한 내리막이 펼쳐져 있었다.


서윤은 속도를 줄이고 페달을 수평으로 맞춘 뒤,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자전거가 울퉁불퉁한 지면 위를 내달릴 때마다 짧고 날카로운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앞바퀴는 자갈에 부딪힐 때마다 불규칙하게 튕겼지만, 서윤은 핸들을 미세하게 조정하며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았다. 경사가 가팔라지자 뒤꿈치에 힘을 주어 페달을 깊이 밟으며 속도를 조절했다.


-좋아, 이 정도는 문제없어. 근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오늘은 손문기 선생님 전시회 오프닝이 있는 날이었다. 손 화실 식구들이 리온 갤러리에 와서 자신을 찾을 생각을 하니 괜히 마음이 속상했다.


-괜찮아. 전시회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리며 핸들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길 한가운데 돌덩이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까만 암석의 날선 면이 햇빛을 받아 번쩍 빛났다. 서윤은 반사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지만, 앞바퀴가 돌무더기를 스치며 중심을 잃었다. 자전거는 미끄러지듯 흔들렸고, 한순간 휘청거리며 그대로 무너졌다.


-앗!


짧은 비명이 터진 순간, 그녀의 몸이 자전거와 함께 튕겨 올랐다. 중력에서 풀려난 듯 허공에 매달린 채, 손은 핸들에서 빠져나갔고, 두 발은 페달을 벗어나 공중에서 엇갈렸다. 곧이어 닥칠 충돌을 직감한 가슴이 차가운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자전거와 함께 럭비공처럼 날아가 땅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얼굴부터 처박히는 충격과 함께 거친 흙이 입과 콧속 깊숙이 밀려들었고, 흙먼지와 뒤섞인 비명이 날카로운 파편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두 다리는 자전거 바퀴에 꼬여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


-으, 으으…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얼굴 한쪽에 강펀치를 맞은 듯한 예리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입안에서는 마른 흙이 서걱거렸고, 귀에는 ‘찌잉’ 하는 이명이 울렸다. 머릿속은 쇠망치에 찍힌 듯 멍하고, 시야는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혼자 당한 일이니 그다지 창피할 일은 없었지만, 곧바로 전혀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엄습했다. 혹시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 갑자기 싸늘한 예감과 함께 울음이 치밀어 오를 듯했다.


-아냐. 괜찮을 거야. 정신 차리자.


땅바닥에 그대로 엎어진 채, 그녀는 충격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뼈마디 곳곳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욱신거렸고, 손끝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다. 혀끝에 와닿은 흙의 거친 감촉이 메스꺼운 불쾌감을 더했다. 그녀는 힘겹게 엉킨 다리를 풀기 시작했다. 흙먼지를 퉤 뱉은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얼굴을 더듬자 오른쪽 뺨 아래가 울퉁불퉁 부어 있었고, 턱 밑은 쓰라렸다. 팔뚝과 무릎에서는 화끈거리는 통증이 올라왔고, 피부가 벗겨진 다리 상처에서도 붉은 열기가 느껴졌다. 손바닥에도 둔한 통증이 남아있었으나, 장갑 덕분에 깊은 상처는 피한 듯했다.


-많이 안 다쳤어. 부러진 데도 없잖아.


서윤은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몸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털어내고는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앞바퀴가 터진 자전거는 만취한 취객처럼 무겁게 비틀거릴 뿐이었다. 멀쩡하게 잘 달리던 타이어를 찢은 범인은 바로 그 녹슨 못이었다. 오랜 세월 벌겋게 산화한 뾰족한 쇳조각 하나가, 하필 그 순간 누군가가 걸려들기를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 기능을 잃어버린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힘이 들었다. 가뜩이나 험한 비포장도로에서 질질 끌리며 휘청대는 앞바퀴 때문에 몇 걸음 옮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겨우 비틀비틀 걷고 있던 그때, 갑자기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이게 우연은… 그러니까,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그가 더듬거리며 내뱉었던 그 말을 서윤은 또렷이 기억했다. 처음 본 남자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운명’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놀란 새가슴이 되어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 하필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마주치다니.


-맙소사, 왜 이럴 때 나타난 거야.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눈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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