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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겁도 없이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얕은 물살이 발목을 감싸며 서늘한 기운이 밀려왔다. 소녀는 잠깐 멈춰 서는가 싶더니, 신발을 붙잡으려는 듯 다시 발을 내디뎠다.


-안돼! 위험해!


도준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소녀는 어느새 물살이 빠른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물이 순식간에 허벅지까지 차올랐고, 소녀는 중심을 잃고 휘청대다가 그대로 물속에 휩쓸렸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계곡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퍼져나갔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작은 몸짓이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악몽이 불쑥 되살아났다.


칠흑 같은 어둠, 도무지 아침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밤. 차 안에 갇힌 채 앞좌석에서 들려오던 부모님의 희미한 신음.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숨 막히는 침묵. 그날, 그는 더 이상 손을 뻗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내가 구할 거야.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아.’


도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친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갈게!


사납게 꿈틀거리는 계곡물이 허벅지를 휘감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소녀는 이미 거센 물살에 휩쓸린 채 몸부림치다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도준은 미친 듯 팔을 휘저으며 급류를 헤집었다.


-꼬마야, 어딨니? 대답해! 조금만 버텨!


그것은 찰나였으나, 그의 의식 속에는 영원처럼 각인된 한순간이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소녀의 몸을 물살은 쉬이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거친 물결 속에서 간신히 손끝에 아이의 살결이 스치는 순간, 그는 단숨에 그 여린 몸을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사건이 났던 그날 밤에는 부모님을 붙잡을 수 없었다. 전복된 차 안, 어둠의 간격은 너무 멀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 생은 이미 저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두 분의 신음은 끝내 침묵 속으로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생명의 온기를 놓치지 않았다.


마침내 얕은 물가에 닿은 그는 소녀를 널찍한 바위 위에 눕혔다. 소녀는 축 늘어진 채 미동조차 없었다. 노란 원피스 밖으로 가냘픈 팔다리가 드러났고, 창백한 이마에는 젖은 머리카락이 엉겨 붙어 있었다. 작은 얼굴은 눈을 꼭 감은 채 잠든 인형처럼 고요했다. 도준은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을 내려주고, 떨리는 손으로 소녀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숨소리는 점점 옅어졌고, 호흡은 금방이라도 멎을 듯 위태로웠다.


그 순간, 보이스카우트 캠프에서 배운 구조법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지도 교사는 아이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입을 맞대고,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누른다. 실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도준은 단호한 손길로 여린 가슴을 꾹꾹 눌렀다. 이어 소녀의 차가운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고 숨을 불어넣었다. 몇 초가 끝이 없는 시간처럼 아득했다. 그러다 문득 소녀의 가슴이 미세하게 들썩이더니, 거친 기침과 함께 물을 토해냈다.


-괜찮아. 안심해. 괜찮아.


도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특해. 잘했어. 이제 다 괜찮아.


소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의 티셔츠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힘에,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어둠 끝에서 처음 만난 따뜻한 체온에 기대듯, 소녀는 다시 잠이 들었다. 도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작고 연약한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구했어.’


뜨겁게 달궈진 바위 위에서 소녀를 내려다보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작은 용기가 단지 소녀만을 살려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날 밤, 점점 식어 가던 두 분의 숨결. 어떻게든 붙잡으려 허공을 더듬던 어린 손. 자신을 옭아매던 어둠 속에서, 그는 분명 한 발짝 벗어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했다는 안도감이, 오래전부터 목말라하던 어떤 감각처럼 다가왔다. 잃어버린 온기. 끝내 닿지 못했던 손. 내내 갈망해 온 것들이었다.


‘내가 아이를 구한 게 아니라, 오늘은 나도 함께 살아난 거야.’


그런 생각과 함께 가슴 깊은 곳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아주 조금,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윤아! 서윤아! 어디 있니?


도준은 소녀를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네 이름이 서윤이로구나. 만나서 반가웠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바위 위에 남겨두고 소나무 그늘 속으로 물러났다. 그의 발자국이 사라진 곳을 향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솔잎을 흔들었다. 잠시 후,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누군가 소녀를 안아 들며 외쳤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서윤아.


고모부 내외와 친하게 지내던 윗집 아줌마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도준은 나무 그림자 속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잘 가라, 꼬마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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