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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1997년 가을, 도준이 남긴 등반일지 한 귀퉁이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횡계에 있는 고모부 댁 마당에서였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니 한 여자가 마당에 서 있었다. 나는 온몸이 땀에 절어 엉망인 차림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묘하게 낯설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선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예감 같은 것이었다.


살면서 여자로 인해 이렇게 가슴이 뛰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 순간, 나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몸이 굳어졌다. 나는 늘 죽음의 바깥에서 살아온 자였다. 산의 벼랑 끝에서, 눈보라 속에서, 매번 ‘살아남은 이유’를 묻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본 순간, 처음으로 ‘살아 있어도 좋다’는 감정이 스쳤다. 생존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응답처럼.


그때 내가 횡계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땠을까. 여전히 서로 다른 세계에 머물며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날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결국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인연이었다. 기억에서 사라져도, 멀리 흩어져 있어도, 결국 다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으니까.


조금 전에, 우리의 인연을 설명할 만한 비유 하나가 떠올랐다. 한 사람이 걸어온 모든 길을 실로 묶어 이어 놓는다면, 나는 아마 다른 이들보다 훨씬 긴 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계 곳곳을 떠돌며 그 실의 길이를 늘여 가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조그마한 실타래의 일상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녀의 씨실과 나의 날실이 오래전에 한 번 엇갈린 적이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어린 꼬마 아가씨는 이제 어여쁘고 성숙한 여자로 자라 있었다. 그녀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내가 그녀를 구했던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했다. 그녀를 구했던 순간, 사실은 나 역시 그녀에게 구원받고 있었다는 것을.


인생에서 중요한 건 실의 길이나 두께가 아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 긴 여정은 결국 공허와 외로움 속을 떠도는 덧없는 여로일 뿐이다. 나는 그녀를 보며 깨달았다. 죽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스물두 해 전 여름, 열세 살 도준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의 바다에 잠겨 있었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날, 그의 세계는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어린 그에게 횡계의 고모만이 유일한 혈육이었다. 고모는 막내아들처럼 살뜰히 그를 보살피며 따스한 식사와 부드러운 말을 건넸지만, 도준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것은 절망이 쌓아 올린 성벽이었다.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가두는 장막이었다. 소년은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길 위에 홀로 선 작은 그림자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여름방학이 다가오던 7월의 어느 날, 도준은 학교를 빼먹고 집 근처 용천 계곡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떠올리기에 그보다 더 나은 장소는 없었다. 산이었다. 그곳에 가면 아직 아버지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주말마다 올랐던 푸른 능선. 땀에 젖은 목덜미를 닦아내며 건네던 시원한 물 한 모금, 정상에서 내려다보던 끝없는 풍경. 아버지 몸에서 번져 오던 그 냄새와 땀의 열기, 단조롭지만 어딘가 따스했던 그 목소리. 그렇게 눈을 감으면, 손끝에 스며드는 듯 아버지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도준, 너는 발이 빠르구나. 아버지를 곧 따라잡겠어.


너그러운 미소로 그를 격려하던 아버지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이제 산은 더 이상 따뜻한 위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 한편에 보듬어 두고 싶은 추억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한 은신처에 가까웠다. 산자락에 홀로 앉아 아픈 시간의 장면들을 더듬다 보면, 그 고통이 서서히 뻗어 와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심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모든 순간을 삼켜버릴 듯했지만,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잔인한 물결에 몸을 내맡겼다.


‘그래. 나를 가져가거라.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해 한여름의 햇살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강렬했다. 나무 그늘조차 뜨거운 기운을 피하지 못하고, 흐릿한 열기로 공기마저 일렁였다. 도준은 녹아내릴 듯한 무력감 속에 스스로를 방치한 채, 개울가 근처 널찍한 바위 위에 무심히 걸터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의식의 저변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 여기 있다!


고개를 돌리자, 개울 건너편에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어린 소녀가 물가를 따라 가볍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면 가까이 날아오르는 나비를 쫓아, 한 걸음 한 걸음 빛 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개울물은 투명한 보석처럼 반짝였고, 소녀는 물비늘 사이를 부유하는 초롱한 그림자 같았다. 도준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릎 위에 무기력하게 얹힌 자신의 손등. 아무런 의욕도 없이 축 늘어진 채, 거기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소녀는 자신과 너무도 먼 세계의 사람이었다. 환한 빛살 아래 자유롭게 뛰노는 저 작은 몸짓은, 그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보드랍고 따스한 무엇처럼 느껴졌다. 어린 날의 바람도, 체온도, 품에 안기던 기억조차 비껴간 삶. 소녀는 그에게 꿈의 풍경 같았다. 아니, 꿈조차 꿔보지 못한 세계의 조각이었다.

 

그러나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어, 내 신발!


도준은 그 소리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물가에 벗어놓은 소녀의 분홍신 한 짝이 개울물에 휩쓸려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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