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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다음 날, 서윤은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 횡계에 도착했다. 차창 밖으로 읍내 중앙로의 공사 현장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의 별장은 시내에서 차로 20분쯤 더 들어간 산기슭에 있었다.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막다른 길 끝자락의 외딴집이었다.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탄 그녀는 울퉁불퉁한 숲길을 따라 한동안 달린 끝에 별장 앞마당에 이르렀다. 집 뒤편은 곧장 수풀 우거진 산속 오솔길로 이어져 있었고,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도 거기까지였다. 뒷좌석에서 내리기 전, 서윤은 미터기 요금에 웃돈을 조금 얹어 건넸다. 빈 차로 되돌아가야 할 운전사를 향한 작은 배려였다.


-여기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손님이 가자면 어디든 가야죠.


차에서 내리려 하자, 택시 기사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긴 외진 곳이라 택시를 불러도 잘 안 들어올 겁니다. 혹시 필요하면 미리 연락 주세요. 사정되는 대로 제가 올 수도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택시에서 내린 서윤은 잠시 숨을 고르며, 비포장도로를 따라 차가 되돌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공기 속에 부옇게 흩날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앞마당의 고요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언덕과 능선을 따라 초봄의 푸른 기운이 스며든 한적한 오후였다. 청바지에 스웨이드 재킷을 걸친 그녀는 어깨에 랩톱이 든 배낭을 메고 있었다. 셔츠 깃을 반듯하게 여민 그녀의 얼굴에는 햇살에 데워진 듯한 혈색이 감돌았다. 두 손을 깍지 끼고 크게 기지개를 켜자, 숲에서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뺨을 스치며 숨 깊은 곳까지 차올랐다. 신선한 공기 덕분인지 서울에서 이어온 긴 여정의 피로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씻긴 듯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하품을 하며, 언덕 위에 자리한 파란 지붕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본래는 낡은 농가였으나, 큰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가 시간을 두고 개축해 지금과 같은 2층 건물이 되었다. 삼각형 지붕과 테라스를 갖춘 현재의 구조는 아버지가 스위스를 여행하며 마음에 담아두었던 목조주택에서 영감을 얻어 직접 설계한 것이었다.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멋을 간직한 이 별장은, 아버지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손수 다듬어 온 결과였다.


이 집에서 큰할머니는 암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거의 사십 년을 홀로 지내셨다. 큰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하나뿐인 아들은 그 전쟁 통에 설사병을 앓다 목숨을 잃었다.


-그때 페니실린 한 방만 맞았어도 나았을 텐데….


살아생전 큰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내뱉곤 하던 그 말은, 지금도 서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횡계는 돌아가신 큰할아버지의 고향이었고, 전쟁 미망인이 된 그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몸을 기댈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그러나 곁에 있던 그 아이마저 잃고 난 뒤, 그녀는 세상과 거리를 두듯 스스로 벽을 쌓고 살아왔다. 질병과 전쟁, 가난이 뒤엉켜 있던 시절. 큰할머니의 삶은 그 자체로 상실의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횡계는 서윤에게 전원의 소박한 삶을 처음 가르쳐준 거의 유일한 터전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배려로 큰할머니 곁에 양자처럼 머물게 되었고, 독립한 뒤에도 여름이나 겨울 방학이면 가족을 데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덕분에 그녀의 기억 속에는 유년 시절 횡계에서 마주한 풍경들이 낡고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서울에서 온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고, 서윤은 그 애들 틈에 섞여 낯선 경험들을 하나씩 익혀갔다. 부뚜막 불구덩이에 넣어둔 감자를 들여다보다 볏짚을 타고 번진 불꽃에 놀라 뒷걸음질 치던 일, 아이들을 따라 산에 올라가 칡뿌리를 캐던 일, 겨울 어느 날 밭둑에서 쥐불놀이를 하다 동네 어른들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던 일들. 그 모든 기억은 오래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마음속 풍경화로 간직되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상급 학년에 접어들면서부터 학업에 쫓겨 횡계를 찾는 일은 차츰 뜸해졌다. 큰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대학 입시 준비에 매달려 있던 그녀는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그 일은 이후로도 미처 갚지 못한 빚처럼 마음 한쪽에 줄곧 남아 있었다.


그동안 큰할머니의 옛집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곳을 다시 찾은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별장에 머문 건 2년 전 가을, 약혼자 태일이 차로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갔을 때였다. 당시에는 학술지 마감을 앞두고 한 달 가까이 머무르며 자료를 검토하고 논문을 정리하느라 거의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집 밖의 풍경이나 계절의 빛깔이 기억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단순히 집수리 상태를 살피러 온 것이니, 적어도 일을 보는 동안만큼은 마음을 풀고 편히 머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횡계에 오길 잘한 것 같아.


그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처럼 따스한 햇볕 아래 나온 탓인지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다. 배낭에서 생수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며 언덕 위 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막 새순이 돋아난 나무들이 집 주변을 감싸며 싱그러운 기운을 더하고 있었다. 최근 공사를 끝낸 별장 지붕은 한결 든든해 보였다.


-이제 빗물이 새는 일은 없겠지….


서윤은 생수병을 손에 쥔 채 돌층계를 따라 천천히 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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