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인사동 밤거리에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윤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섰다. 뿌옇게 흐린 유리 벽 너머로, 수묵화처럼 번지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아스라이 멀어져 간 옛 기억들을 떠올렸다.
방화동 손 화실을 다니던 어린 시절, 손문기 선생을 따라 드나들던 인사동 거리에서 그녀는 운 좋게 한국 화단의 원로 거장들을 먼발치에서 뵐 수 있었다. 이름으로만 듣고 작품으로만 알던 대가들을, 숨죽이며 지켜본 기억은 놀람과 설렘 그 자체였다.
사춘기 소녀에게 꿈과 낭만을 선사하던 예술가들의 거리. 지금은 그 모든 시간이, 그녀가 매일 맞서는 현실과 책임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덧 29세가 된 그녀에게는 때때로 숨을 돌릴 만한 공간이 필요했다. 공중전화 부스는 그럴 때마다 잠시나마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은밀한 쉼터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오늘 밤, 전화 수화기를 손에 쥔 서윤의 마음은 무거웠다.
강태일과 약혼한 지도 어느새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까다롭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의 기준으로 늘 그녀를 대해왔다. 지금도 그가 미간을 찡그린 채 자신의 전화만을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자 몸이 절로 굳어졌다. 그는 즉시 연락이 안 되면 괜한 짜증으로 그녀를 힘들게 했고, 자신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대하는 태도 역시 용납하지 않았다.
서윤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화벨이 세 번 울렸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전화기를 쏘아보고 있을 태일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네 번째 전화벨이 울리고 나서야 그가 전화를 받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바빴나 봐?
-미안해요. 전시 준비하느라 자리에 없었어요.
-아직 일 안 끝났어?
-네, 뒷마무리가 남았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내일 쉬는 날이잖아. 1박 2일 여행 가자고. 오늘 밤 떠났다가 내일 오후에 돌아오면 돼.
그의 말투는 유독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이 서윤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의 뜻에 반하는 말을 꺼내는 일은 늘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1박 2일의 여행이라니. 젊은 남녀에게 그것은 은연중에 하룻밤의 관계를 전제하는 말이 아닌가.
‘나를 너무 쉽게 여기는군.’
서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더 이상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가 점점 더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마음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왜, 싫어? 우리 밤에 같이 있었던 것도 꽤 오래됐잖아.
강태일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들떠 있었다. 그 안에 조급한 갈증이 묻어났다.
-아니, 그건 알지만…
-뭐가 문제야? 내가 지금 당장 데리러 갈게.
잠시 망설이던 서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생각할 틈도 없이 둘러댄 말이었다.
-아니요. 내일 출근해야 해서요.
-출근해?
그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번 전시를 수요일에 제대로 오픈하려면 정리할 게 아직 많아요.
-너무하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이잖아. 리온에서 사람을 너무 부려 먹는군.
-제가 해야 할 일을 다 못 끝낸 거예요. 제 책임이니 끝까지 해야죠.
-쳇, 그런데 거… 그 갤러리 언제까지 다닐 셈이야? 이제 쉴 때도 되지 않았어?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은 미래의 배우자를 향한 배려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질문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것만 귀하게 여겼고, 타인이 지닌 가치나 바람쯤은 쉽게 흘려보냈다.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인사동 거리를 밝히는 크고 작은 불빛들이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처럼 흔들렸다. 소녀 시절, 예술가의 꿈을 처음 품게 했던 이 거리. 그 꿈을 지키기 위해 버텨온 시간과 노력만큼은 허망하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의 요구에 맞춰 움직이고, 약속을 조율하고, 성적 주체성을 내어준 채 여행에 나서고, 가족사마저 복잡한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결혼 후 펼쳐질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묶이지 않은 채,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가고 싶었다. 한 집안의 울타리에 갇혀 쉽게 소진될 인생이라면, 지금껏 애써 걸어온 이 길은 애초부터 의미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서윤은, 곧 남편이 될 약혼자와의 잠자리가 꺼림칙하다는 말을 끝내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아직 너의 여자가 아니라고, 쉽게 허락할 내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긋는 일도 그녀에겐 쉽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앞으로 닥칠 일보다 방화동 식구들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는지 몰랐다. 늙으신 아버지는 은퇴를 앞두고 있었고, 병약한 어머니는 여전히 자주 자리에 눕곤 했다. 집안의 기둥이어야 할 오빠는 사업 실패 이후 신용불량자가 되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집안 사정들을 떠올릴수록, 그녀는 도무지 자기 입장만을 앞세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아, 지금은 좀 그래요…
태일은 신경을 건드리는 말들을 이어갔지만, 서윤은 늘 그러하듯 감정을 숨긴 채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마침내 전화를 끊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오늘 하루는 유난히 길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