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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사무실로 돌아오자,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가 눈에 띄었다. 그 위에는 강태일의 이름과 함께 ‘회신 부탁’이라는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서윤은 수화기를 집어 들려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우건설의 후계자인 강태일을 처음 만난 건, 서윤이 뉴욕대 미술사 프로그램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


그 무렵 리온 갤러리에서는 아프리카 조각전이 한창이었다. 최희숙 관장이 직접 짐바브웨에서 선별해 온 쇼나 조각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열망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며 당시 한국 미술계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서윤은 작품 목록을 손에 든 채 전시장을 찾은 컬렉터들을 일일이 응대하고 있었다.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이나 야수파의 원시주의와 연결 지어 덧붙이는 그녀의 설명만으로도 관객들은 20세기 초 파리 아방가르드의 현장에 직접 서 있는 듯한 몰입과 감동을 표했다. 짐바브웨의 열악한 경제 사정과 환율 변동으로 인해 작품 가격이 예상보다 낮게 책정되었다는 것도 전시회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국의 원시성과 현대 미술적 맥락이 결합된 전시는 컬렉터들의 예술적 향수를 자극했고, 작품 구매 열의는 한층 고조되었다.


강태일도 그때 자기 누나 강수경과 함께 리온 갤러리를 찾았다.


-짐바브웨의 쇼나 조각은 전통적인 아프리카 석조 예술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입니다. 석영, 말라카이트, 록 마블, 호화석 등으로 다듬어진 이 조각들은 부드러운 표면 덕분에 섬세한 조형을 가능케 하며, 그 독특한 윤기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신입 큐레이터였던 서윤이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태일은 두 눈을 반짝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서윤은 어딘지 모르게 끈적이는 그 시선이 불편했지만, 애써 모른 척 외면하며 준비한 말만 끝까지 전한 뒤 자리를 피했다.


쇼나 조각전이 끝난 얼마 후, 서윤은 관장의 요청으로 다른 직원들과 함께 성북동에 있는 강태일의 본가로 향했다. 조각상을 직접 배달하기 위해서였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언덕길 골목으로 차량이 들어서자, 주차장과 맞닿은 문을 지나 드넓은 정원이 펼쳐졌고, 집 울타리 안은 대도시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고요와 적막이 감돌았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이렇게 꾸미고 살지? 집도 무슨 미술관 같잖아.

-쉿, 조용히 해.


작품을 함께 나르던 남자 직원들이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잔디밭에 놓인 디딤돌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프렌치 도어 양식의 현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 큰 거실에는 대동여지도 같은 고서화와 고가구, 오래된 골동품들이 품격 있게 놓여 있었다. 그날 배달된 쇼나 조각은 모두 여덟 점이었다.


-어서 와요. 그런데 아프리카 조각인지 뭔지, 전시장에서 봤을 때와는 좀 다른 것 같네. 안 그런가?


강태일의 누나 강수경은 서윤을 마치 자기 밑에 있는 여직원처럼 대하며, 무례하게 굴었다. 그런 누나 옆에서 어슬렁거리던 태일이 입꼬리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은 채, 서윤에게 느닷없이 데이트를 제안했다.


-우리 언제 같이 저녁 먹을래요? 그쪽에 흥미가 있어서…

-미쳤니? 처음 보는 여자한테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


강수경은 눈을 부라리며 남동생을 나무랐다.


-처음 보긴? 그때 리온에서 만난 큐레이터, 나서윤 씨잖아.


인사동 첫 만남부터 몹시 눈에 거슬리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윤은 더욱 불쾌함을 느꼈다. 리온 갤러리의 일개 큐레이터라는 직함이 이런 자리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들이 속한 세상과 자신의 세계가 너무 다르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들 앞이라도 함부로 얕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조각품 자리 배치가 끝난 후, 서윤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했다.


-어, 잠깐만요. 제가 실례를 했다면 용서하세요.


태일은 그녀 앞으로 다가서며 짐짓 성의를 담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이제 갤러리로 돌아가야 해서요.

-그렇군요.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나면 좋겠네요.


서윤은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일주일 뒤, 강태일이 서윤 앞에 다시 나타났고, 그 후 벌어진 여러 사건과 기막힌 사연들이 결국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때 조각품을 배달하던 갤러리 여직원은 어느새 성북동 유력가 집안의 약혼녀가 되어 있었다. 강태일의 아버지 강문태는 신우건설의 창립자였고, 그의 맞아들인 태일은 스탠퍼드 MBA를 마치고 귀국한 뒤 전략기획실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수도권 재건축 사업을 기반으로 굳건한 실적을 쌓아온 이 중견 건설사는 업계에서도 ‘묵직한 실속형’ 회사로 평가받았다.


-성북동의 컬렉터라…. 이제 신분 상승 사다리에 올라타신 건가요?


언젠가 친구 제이가, 비아냥조로 서윤에게 던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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