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그림을 끝까지 지켜낸 알바생은 신음을 삼킨 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서윤도 화폭이 기우는 쪽으로 휘청였으나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두 사람은 그림 양 끝을 붙잡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


서윤이 묻자, 알바생이 ‘괜찮아요’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등 뒤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리온 갤러리의 대표, 최희숙 관장이었다. 하필 그 순간, 전시장을 지나던 참이었다.


-미친다 정말. 지금 이 작품이 얼마짜린지 알아?


쓰러진 사다리와 긴장한 직원들을 훑어보던 그녀는 곧바로 서윤이 바치고 있는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윤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관장은 손을 들어 그 말을 잘랐다.


-이 작품 훼손되면 누가 책임질 건데? 너야?


조명을 조정하던 남자 직원이 절뚝이며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사다리가 갑자기 흔들려서…

-많이 다쳤어요?


서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 직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알바생은 어깨를 으쓱하다가 어정쩡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최 관장의 관심은 오로지 그림 상태에만 쏠려 있었다. 그녀의 안경 너머 시선은 차가웠고, 말투는 그보다 더 냉랭했다.


-이 정도라 그나마 다행이군. 쯧쯧, 칠칠맞지 못하게… 앞으로는 좀 더 조심들 하시지, 응?


직원들은 숨을 죽인 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서윤 씨, 잠깐 내 사무실로 올라와.


최 관장은 마지막 말만 툭 던지곤,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알바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그림의 무게가 조금 전보다 훨씬 묵직하게 느껴졌다.

 

1968년에 처음 문을 연 리온 갤러리는 인사동 거리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을 선도하며, 역사 깊은 화랑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곳에서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박서보, 이우환, 정창섭, 최욱경 같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뿐 아니라, 가끔은 샤갈, 마티스, 클림트, 라울 뒤피, 앤디 워홀 같은 외국 거장들의 작품도 특별 전시되었다. 또한, 장래성 있는 젊은 작가들을 꾸준히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 제작과 프로모션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다.


관장실은 리온 갤러리의 지난 세월을 집대성한 기록과 자료로 가득한, 말하자면 작은 보물창고였다. 리온의 실질적 오너이자 관장인 최희숙은 60대 후반의 여성으로, 한국 화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출발은 지금은 철거된 소공동 반도호텔 지하 갤러리의 카운터였다. 막 여고를 졸업한 풋풋한 나이에 그곳에서 맺은 화가들과의 인연은, 시간이 흐르며 한국 화랑계를 대표하는 화상으로 성장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3층 복도 끝, 리온 갤러리 관장실에 들어서면, 40평 남짓한 공간에 오래된 자료와 화집, 엽서, 도록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최희숙 관장은 데스크에 앉아 서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번뜩이는 표정에 서윤은 순간, 어깨가 움츠러드는 기분을 느꼈다.


-작품 배치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왜 그 작품을 이제야 옮기는 거지?


그녀는 안경테를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최 회장님 사모님께서 그 작품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지 않으면 다시 가져가겠다고 하셔서요.


서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장 사모님까지 나서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좀 지나치지 않나?

-아, 당연히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가 정당하게 빌린 거잖아.

-물론이죠. 그런데, 이번 전시회를 위한 협찬이라서…

-답답할 노릇이네.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

-네? 그게 무슨…

-‘공작 도시’ 시리즈는 함께 묶어서 전시해야, 그 후광을 살릴 수 있지. 안 그래?

-네, 당연히… 이번 회고전 도록에도 차례대로 함께 실려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작품은 ‘공작 도시’ 시리즈 중에서도 대표작이야.

-일반에게 공개되는 것도 거의 처음이죠.

-그런 작품을 뚝 떼서 따로 전시한다고? 맨 앞에만 전시하면 장땡인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워낙에 고집이…

-알았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 그 작품은 원래 자리로 돌려놓도록 해.

-아, 네에… 알겠습니다.


그녀는 옛 스승의 전시회를 끝까지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어깨가 무거웠지만, 정작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흔들렸다. 관장이 알아서 하겠다는 말에, 서윤은 결국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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