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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도준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오대산 매표소 앞에 세워둔 4륜 구동 랜드로버로 돌아왔다. 십여 년 전에 한국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영사가 귀국하며 남기고 간 차였다. 겉보기엔 제법 낡고, 세월의 흔적도 역력했지만 달리는 데엔 아직 큰 문제가 없었다. 필요할 때마다 도준이 직접 손을 대어 엔진을 만지고 낡은 부품을 갈아 끼워온 덕이었다. 그렇다. 그는 그런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었다. 그의 특별한 재주 중 하나는, 뭐든지 잘 뜯어고친다는 점이었다.

 

손재주는 어려서부터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 속을 들여다보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고, 한번 분해한 것은 기어이 다시 조립해 내는 묘한 집중력과 끈기를 보이곤 했다.물론 그 실험이 매번 성공한 건 아니다. 덕분에 집 안의 라디오며 시계가 수난을 겪는 일도 잦았다.


부엌 창가에 놓인 라디오가 이유 없이 먹통이 되기라도 하면, 그는 어머니의 꾸중을 피해 달아나거나 동네 전파사의 딱딱한 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야 했다. 양팔에 토시를 낀 수리공 아저씨가 돋보기를 들여다보며 작은 부품을 갈아 끼우고 납땜질을 하는 동안, 어린 도준은 몇 시간이고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외아들이었던 도준은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 속에서 자랐다. 호기심 많고 늘 뛰어다니기 바쁜 아이였지만, 두 분은 언제나 곁에서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 다정했던 나날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직 부모의 품이 간절하던 어린 시절, 도준은 양친을 잃고 덩그러니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2월, 열세 살 도준은 잠시 강원도 고모 집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동대문 시장에서 옷감 장사를 하던 양친은 구정 대목 탓인지 간간이 전화만 할 뿐 좀처럼 데리러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도준은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 너무 심심해. 빨리 좀 데리러 와. 안 그러면 나 혼자 서울 갈 거야.


어린 아들이 떼를 쓰듯 투정을 부리자, 부모는 그날 가게 문을 닫고 밤길을 달려 마침내 고모 집에 도착했다.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도준은 망설임 없이 짐가방을 챙겨 부모님을 따라나섰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그들 일가족이 탄 소형 세단은 비포장도로 위를 덜컹거리며 밤의 정적을 깨웠다.


-준아, 편하게 눈 좀 감고 자렴.


엄마의 잔잔한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를 포근히 감돌았다. 도준은 두 분의 웃음 섞인 대화를 들으며,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강원도의 구불거리는 산길, 새벽 한 시 무렵. 비극의 그림자가 조용히 그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잠결에 요란한 클랙슨이 들린 것도 같았다. 아버지가 몰던 세단은 마주 오던 트럭을 피하려다 미끄러졌고,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 차가운 계곡 아래로 추락했다.


어두운 혼돈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이미 전복된 상태였다. 앞좌석에 탄 부모님은 피투성이로 정신을 잃고 있었다. 도준은 거꾸로 매달린 채, 차 안에서 필사적으로 ‘엄마’ ‘아빠’를 부르며 몸부림쳤다.


처음엔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지만, 곧 그마저도 사라졌다. 그는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꼼짝할 수 없었고, 그 끔찍한 순간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경계에 멈춰 서 있었다. 죽음은 너무도 잔혹한 얼굴로 다가왔고, 그날의 공포는 어린 소년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졌다.


119 구조대가 도착한 건, 여명의 빛이 산자락을 타고 번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데리러 오라고 떼만 쓰지 않았더라면…


뜨거운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 그리고 부모님의 죽음이 전부 자신의 탓이라는 죄책감은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다.


그의 일가친척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까이 왕래하는 혈육이라곤 고모네 일가족이 전부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모마저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도준은 고모부를 아버지처럼 의지하며 살아갔다. 고모부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지만, 고종사촌들과는 나이 차이가 커 함께 어울릴 일이 거의 없었다. 도준은 일찍이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무게에 서서히 익숙해지며 자신만의 삶을 배워나갔다.


부모님이 남긴 얼마간의 재산 덕분에 당장은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대학을 마칠 무렵엔 은행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등반과 등산 장비에 가진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결과였다.


부모님이 여전히 살아계셨다면, 매일 산에서 살다시피 하는 아들을 두고 무엇이라 했을까. 어머니라면 끊임없이 잔소리를 쏟아냈을 테고, 아버지는 중간에서 방패막이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뿐인 외아들에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들이 아닌가. 문득 부모님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리움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들며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오대산 등산로 입구에는 산행을 준비하는 등산객 서너 명이 모여 있었다. 매표소를 온종일 지키는 나이 든 직원이 도준을 보자 창구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


-오늘도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는 거요?
-네, 그러믄요.


도준은 뒤를 돌아보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씨도 추운데 기운이 펄펄 솟는구려. 지극정성일세. 대체 무슨 일 하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날마다 산을 뛰어다니는 거요?
-운동 삼아 그러는 거죠. 그럼, 또 뵙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요.

 

매표소 직원은 손을 흔들고는 다시 창구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도준은 랜드로버 운전석에 올라 엔진이 예열되기를 잠시 기다렸다. 차창 너머 보이는 나무들의 헐벗은 가지 사이로 촉촉한 봄기운이 감돌았다. 머지않아 연한 초록 새싹이 돋아나고, 풍성한 녹음이 능선을 따라 번져갈 것이다. 그는 땀이 밴 목덜미를 수건으로 한 번 훑어낸 뒤, 횡계에 있는 고모부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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