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김미진의 오후 3시

글. 그림 김미진


인호는 그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의문과 설명되지 않는 거리감이 남아 있었다. 말투와 표정, 시선에 이르기까지, 어딘가 어긋난 감정의 온도 차가 그를 계속 불편하게 만들었다.


기자 생활 십수 년. 익명 뒤에 숨어 정보만 남기고 사라진 사람들, 말보다 눈물이 먼저였던 고발자들, 사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마치 진실인 듯 내보였던 그들. 그런 이들을 상대해 온 세월은 인호에게 사람을 가려내는 직감을 남겼지만, 동시에 모든 이야기를 의심하게 만드는 나쁜 습관도 함께 남겼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목적을 떠올렸다. 도준과 SY 사건의 핵심에 놓인 두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단어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기도 했다. 인호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숨을 삼켰다.


‘전혀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군.’


그 순간, 조금 더 지켜봐도 괜찮겠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 이 앞에서 무엇인가가 막 실체를 드러내려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더니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꺼낸 봉투 안에는 도준이 어떤 여인과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포즈와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깊이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사진 속 여인의 얼굴은 맑고 따뜻했다. 가늘게 실눈을 뜬 눈매와 수줍은 미소가 투명한 봄 햇살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감쌌다. 단번에 시선을 압도하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오래도록 눈길이 머무는 얼굴이었다. 침묵이 고여 있는 사진의 안쪽에서, 그녀는 말없이도 분명한 어떤 것을 전하고 있는 듯했다.


-이 여자분이 그 SY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래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과연, 이 사진들만으로 이 여자가 <지상에서 쓴 마지막 편지>의 수취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호는 섣불리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문 채, 침묵을 고수했다. 지금은 그녀의 말을 먼저 들어보는 편이 나아 보였다.


-참, 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 편지는 가지고 오셨죠?

-아, 그게 좀... 너무 갑작스럽게 연락을 주셔서. 사실은...

-그럼, 안 가지고 나오셨다는 말씀인가요?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짧고 단호하게 물었다. 인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원정대는 아직 네팔에 머물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무사히 하산한 뒤, 현재 카트만두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서바이벌 키트와 함께 로체 정상에서 발견된 그 편지는, 도준과 각별한 사이였던 문형근이 여전히 보관하고 있었다. 한성일보에 실린 편지 전문은 그가 하산 중에 팩스로 전송한 것이었다.


-다음 주쯤, 한국원정대가 귀국할 예정입니다. 이 여자분이 SY라는 게 확실하다면, 그때 원본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이 복사본밖에 없습니다.


인호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슬며시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도준이 남긴 편지를 복사한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의심과 당혹감이 어렴풋이 스쳤다.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솔직히 장담은 못 드립니다.

-그럼, 제가 왜 여기에 나온 거죠?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명예라뇨...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이죠?

-이분이 수취인이 맞는지, 그것부터 판명하는 게 우선입니다. 정말로 SY가 확실하다면, 제가 최대한 돕겠습니다.

-잘 모르겠네요.

-SY 본명은 뭔가요?

-오늘은 날씨가 좋았어요.

-네?

-산에 높이 올라갔다가, 굴러떨어지기 딱 좋은 날이죠.

-그게, 무슨...?

-등산 안 좋아하세요? 아, 안 좋아하시는구나.

-허허, 말씀을 돌리시는군요.

-흠.

-죄송합니다.

-...

-저기...

-...

-저는 그러니까...

-저랑... 친자매나 다름없는 친구예요.

-네? 이분이... 이 여자분이요?


인호가 사진 속 여인을 가리켰다.


-SY... 서윤이에요. 나, 서, 윤


그녀는 다시 침묵했다. 떠오르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인호는 녹음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작동 버튼을 눌렀다. 어떤 말이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를 바라며, 그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창밖으로 서울 시내의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의 녹음기는 조용히 작동하며 빨간 불빛을 깜빡였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