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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저녁 6시경, 초판 신문이 배포되자 인호는 신문사 앞에서 택시에 올랐다. 약속 장소를 남산 자락의 한 호텔 라운지로 정한 데에는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산’이라는 공간이 무의식중에 도준의 이미지를 불러왔기 때문일 것이다.

 

호텔로 들어서자 라운지 창가 쪽에서 홀로 앉아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짧게 자른 머리와 매끄럽게 재단된 회색빛 바지 정장 차림. 서른 초중반쯤으로 보였지만, 인상은 또래보다 한층 성숙했다. 단정하고 절제된 옷차림과 말간 피부, 침착한 눈빛이 묘하게 어우러져 특종 분야의 전문가 같은 인상을 풍겼다. 양손을 단정히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에서는, 첫인상과는 다른 어딘가 애잔한 기색이 느껴졌다.


-제 이름은 제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인호도 간단히 자기소개를 마친 뒤, 신문사 로고가 새겨진 명함을 그녀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녀는 커피를, 인호는 버번위스키를 주문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테이블 위로 잔잔한 재즈가 낮게 깔렸다.


그녀의 눈빛은 꿰뚫는 듯 예리하면서도 정제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쏘아보는 건 아니었지만, 정면으로 마주한 그 시선에는 묘한 압박이 있었다. 인호는 그 눈빛이 어쩐지 불편했으나, 말이 끊겨 어색해지는 순간을 피하려 주문한 게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이름 외에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잠시 뒤, 웨이터가 커피와 위스키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인호는 숨을 고른 뒤,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신문 기사에 나온 SY를 알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 사진 속 여자분이 정말 SY라는 걸 제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리며 두어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 손끝은 무척이나 침착했고, 입가엔 말간 김이 스치듯 흩어졌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만난 분 앞에서 꺼내는 게 쉽지 않네요. 하지만 제 친구를 위해서 용기를 내야겠죠.


그녀는 커피잔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소 엉뚱하면서도 도발적인 의문을 꺼내놓았다.


-저기... 남녀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이라는 게, 결국 뭘까요?

-그게 무슨?


인호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쾌했다기보다, 질문 자체가 너무 느닷없고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에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던 단어, 그 어색하고도 진부한 이름, ‘사랑’. 이런 이야기를, 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과 나눠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인호는 등받이에 기댄 허리가 굳어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이 만남의 본질이 바로 그 단어 안에 있다는 듯,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인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것은 친구 SY를 위한 용기이자, 어쩌면 그녀 자신을 향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 감정의 속살 같은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인호는 짧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피했다.


-지금 그게, 꼭 필요한 질문인가요?


그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다소 냉정한 어조로 덧붙였다.


-전 질문을 받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닙니다. 질문은, 제가 해야죠.

-네, 그렇죠. 물론이에요.


제이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의 반응이 무례하게 느껴졌을 법도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어진 대화 속에서 그녀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현실이 때로는 남녀 사이의 애정보다 더 단단하고 귀하게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랑’이라는 말을 세상이 부여한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다시 바라보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도준 씨와 제 친구가 그랬어요.


제이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 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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