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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지상에서 쓴 마지막 편지.


한성일보의 1면을 장식한 굵은 활자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2년 전 로체 남벽에서 사라진 도준이, 마침내 죽음 너머에서 말을 걸어온 순간이었다. 다른 일간지들도 앞다투어 이 사연을 특종으로 다뤘지만, 도준이 로체봉 정상에 남긴 편지의 전문을 공개한 곳은 한성일보뿐이었다.


그날, 문화부 기자 김인호는 출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신문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몇 년째 줄곧 입고 다니던 트렌치코트는 후줄근했고, 입에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전날 밤, 한성 문예지 수상 작가인 시인 모 씨와 함께 신촌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신 터라 머릿속은 여전히 안개에 잠긴 듯 뿌옇게 흐려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긴 복도를 지나 편집국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들썩이는 실내 분위기에 그의 눈빛이 잠시 굳어졌다.


-왜 이렇게 시끌벅적한 거야....


편집국은 본사 건물 3층 전체를 통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천장 아래 허공에는 부서별 팻말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인호는 가급적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문화부에 있는 자신의 데스크를 향해 걸어갔다.


지각을 하루 걸러 한 번씩 밥 먹듯이 하는 부하 직원을 좋아할 상관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직속 상사인 권 부장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중에 면전에서 크게 꾸지람을 듣게 되겠지만, 우선은 한시름 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스러운지 알고 싶었으나, 옆자리에 앉은 선임 기자 역시 통화 중이어서 그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편집국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문화부에는 좀처럼 얼굴을 비치지 않던 인물이라, 인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꼿꼿하게 바로 세웠다.


-김인호 기자.

-아, 예.


인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제대로 한 방 날렸던데. 축하해.

-네?

-그 기사 말이야. 오늘 1면 탑으로 뽑았잖아. 하하하.


편집국장의 큰 웃음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흥미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인호는 회사 내에서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이나 자긍심보다, 전에 없이 펼쳐진 이런 상황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져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날 오전 내내 편집국 전화벨이 멈추지 않았던 건, 도준에 대한 관심이 아직 세상에서 지워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의 면면도 다양했다. 해외 독립영화제 수상 감독, 발표가 지지부진하던 시나리오 작가와 소설가, 출판 편집자, 방송국 간부들까지 줄을 이었다. 기사에 감동했다는 일반 독자들의 전화도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김인호 기자를 찾았다. 도준 특집 기사를 쓴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편집국장은 다른 경쟁지들을 제쳤다는 승리감에 얼굴이 잔뜩 상기돼 있었다. 반면 인호는 숙취로 인한 후유증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참기 힘들 만큼 하품이 자꾸 새어 나왔다.


-이번에 로체에 올라간 등반대장이 네 친구라며?

-네. 등반대장 우태길이 남체에서 팩스를 보냈어요.

-하여튼 대단해. 우리가 크게 한 건 했어. 위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더라고.


편집국장은 인호의 팔뚝을 한 번 꾹 잡아본 뒤, 흡족한 표정을 남기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조용해진 전화기는 이내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홍 기자가 눈을 찡긋하며 양손 엄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와, 신난다. 브라보!

-뭘, 그런 걸 가지고... 촌스럽게.


인호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으려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문화부장이 자리에 앉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를 불렀다. 인호의 미간이 순간 움찔했다.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 지각이었다. 기사 반응이 좋으니 큰 날벼락은 없겠지만,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왜요.


그는 부장 앞 접대용 의자에 털썩 앉으며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입안이 껄끄럽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부장은 신문 지면을 손끝으로 툭 가리켰다.


-여기, 편지에 나오는 ‘SY’라는 사람.


인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이, 거기 있었나?’ 기억의 지면을 되감듯 머릿속에서 활자를 더듬었다.


-부인이나 여자친구라면 굳이 이니셜로 남기진 않았겠지.


부장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도준은 결혼 안 했어요. 자식도 없고...

-그럼 혹시 불륜 관계 아니었을까? 연상녀라든지, 유부녀라든지.

-네? 그게 무슨...

-편지 말투, 좀 닭살 돋지 않아? 너무 감상적이잖아. 어이, 손 기자, 이리 좀 와봐.


손 기자는 결혼 15년 차를 맞은 문화부의 유일한 기혼 여성이자, 부서 순환 대상에서 제외된 연륜 깊은 전문 기자였다. 그녀는 재킷 뒷자락을 가볍게 정리하며 다가와 지면을 힐끗 내려다봤다.


-왜요,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요?

-여기 도준. 왜 편지에 존댓말을 썼을까?


손 기자는 피식 웃었다.


-저도 여행 가서 남편한테 엽서 쓸 땐 그래요. 평소엔 반말인데, 그럴 땐 존댓말 써요.

-왜?

-말실수 줄이려고도 하고... 단정하고 품위 있어 보이잖아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덧붙였다.


-둘만 아는 언어 문법 같은 거죠. 겉으론 존댓말인데, 속에는 훨씬 진한 감정이 들어 있어요. 일종의 이중 어법이랄까요. 그 미묘한 거리감이 오히려 더 끈끈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


손 기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부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인호를 다시 바라봤다. 뭔가 꼼수를 떠올릴 때마다 짓던, 그 불편하고도 느끼한 표정이었다.


-이중 어법이라... 흥미롭군.

-네? 아, 아...

-후속 기사 써야지. 뭐하고 있어?


부장은 휴먼 다큐 형식으로 서너 차례 연재도 가능하겠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 눈빛은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인호는 손에 쥐고 있던 크리넥스를 눈가에 갖다 대고 문질렀다. 자신이 쓴 기사가 이렇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기자로서 분명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떠들썩한 반응은 여전히 낯설고, 어딘가 부담스러웠다. 그가 적어 내려간 단어와 문장들, 그 행간의 의미들이 누군가의 오랜 침묵을 건드린 듯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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