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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늦은 오후, 베이스캠프 주변에 걸린 크고 작은 오색 깃발들이 차가운 그림자 속에 나부꼈다. 두꺼운 털모자를 눌러쓴 늙은 셰르파가 식당 앞에서, 마니차를 닮은 낡은 놋쇠 그릇을 천천히 두드렸다.


덩, 덩, 덩......


그 소리는 회색빛 고원과 오래된 사원의 저녁 종처럼, 허기와 고독에 잠긴 이들의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날의 일과에 지친 대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늙은 셰르파는 두 손을 모아 ‘나마스테’ 인사하며 그들의 무탈한 밤과 내일의 건승을 조용히 축원했다. 고산 지대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베이스캠프의 한 끼 식사는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기도이자 의례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희망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한 대로 무사하기를......


문형근은 식당 텐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생애 첫 해외 원정에 오른 어린 대원, 청송이었다. 보송보송한 얼굴에는 긴장과 기대가 섞여 있었고, 목소리에는 밝으면서도 어딘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감돌았다.


-대선배님, 그것 저도 잠깐 만져봐도 될까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형근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청송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순한 선배가 아니라, 거의 큰아버지뻘로 보였다.


-도준 선생님은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에요.


스물두세 살쯤 되었을까. 청송의 얼굴에는 아침 햇살 같은 순수함과 원시 자연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어른거렸다. 그 젊음의 눈부심이 오늘따라 유난히 어여뻐 보였다.


문형근은 오랫동안 전문 산악인들과 동행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벌써 아홉 해째, 그는 카트만두에 터를 잡고 여행자 숙소를 운영하며 지내고 있었다. 히말라야에 반해 드나들다 보니 어느덧 고향처럼 정든 땅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고산의 위험을 온몸으로 감당할 만큼 몸도 나이도 예전 같지 않았다. 오랜 세월 산을 오르며 얻은 크고 작은 부상들이, 그의 한계를 무엇보다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번에 바쁜 숙소 일을 잠시 접어둔 채 한국 원정대를 따라 베이스캠프까지 오른 것은, 아마도 젊은 시절, 오직 산을 사랑한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격렬하고 벅찬 감각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말라야에 도전했던 수많은 선후배들처럼, 그도 한때는 집착에 가까운 열망으로 산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람이 머물다 간 옛 자리를 조용히 다음 세대에게 내어줄 때가 되었다.


-이거, 도준의 것 말이냐? 그래, 만져보아라.


문형근은 손에 들고 있던 서바이벌 키트를, 오래된 유산을 전하듯 조심스레 청송에게 건넸다. 히말라야를 꿈꾸는 이 젊은 산악인 역시 언젠가 저 설벽 어딘가를 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전설 속 주인공이 된 도준의 유품은 도전의 가치를 증명하는 가장 깊고도 분명한 실체였다. 부재의 기록을 품은 작은 캡슐 하나가, 저 먼 신들의 영역을 향한 오래된 동경을 다시 불러왔다. 청송은 그 상실의 흔적을 두 손에 받쳐 든 채 한동안 말없이, 감회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좋으냐?


문형근이 물었다.


-그럼요. 믿어지지 않아요.


청송의 대답은 맑고 또렷했다. 어릴 적부터 도준은 그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짤막한 기사에도 가슴이 뛰었고, ‘히말라야’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출렁였다. 청송이 산을 향한 열망을 키우고 대학 진학 후 본격적인 등반길에 나선 것도, 모두 그 존재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한때 무지개처럼 아득히 아른거리던 환영이, 이제는 손에 쥔 유품 하나로 명료하게 되살아나, 짙은 감동으로 그의 가슴 깊은 곳을 두드렸다.


그때 문형근의 두 눈은 청송이라는 한 청년의 영혼을 관통해, 저 너머 오래전 푸른 느티나무 같았던 도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배님,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도준입니다.


그날도 도준은 조용히 말을 건넸다. 말보다 눈이 먼저 말을 거는 청년이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 상실의 흔적은 강기슭 어딘가로 스며든다. 언젠가 다시 피어오를 전설을 기다리며, 그는 청송을 향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이 젊은이도 언젠가 저 설산의 능선을 훨훨 날 수 있기를. 바람처럼 가볍고, 무한히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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