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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의 오후 3시

글·그림 김미진


2000년 5월 17일 오후 2시경. 한국 원정대원 이성호는 그토록 멀고 고된 길을 걸어, 하늘과 맞닿은 수직의 극점, 로체봉 정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숨소리는 거칠었고, 몸은 쓰러질 듯 휘청거렸으나 그는 얼어붙은 눈과 빙하 위를 지나 묵직한 걸음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정점에 아이스 피켈을 깊숙이 박고, 태극기를 펼쳤다. 바람결에 펄럭이는 깃발 하나. 그는 가슴이 타는 듯한 환희에 몸을 맡겼다.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 속, 온몸이 떨리던 전율의 순간이었다.


-올라왔어. 드디어.


그의 얼굴에는 오랜 여정의 피로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고글 너머로 붉게 부푼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고, 입술에는 따개비처럼 굳은 물집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방한모의 족제비 털은 얼어 터진 뺨을 거칠게 스쳤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천계, 까마득히 높아만 보이던 로체봉 정상에 지금 그는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조차 실감은 희미했다. 여기는 인간의 욕망과 의지를 넘어선 또 다른 변방 지대. 숨이 막히도록 희박한 공기 속, 신들의 자치 구역이었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끝없는 지평선이 완벽한 원형을 그리며 눈앞에 펼쳐졌다. 이성호는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두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발 아래, 층층이 쌓인 설빙 절벽이 아득히 뻗어 있었고, 그 너머로 날카롭게 치솟은 눕체의 첨봉이 손에 닿을 듯 다가왔다. 에베레스트는 희뿌연 설연을 휘날리며 하늘 끝을 향해 솟구치고, 남쪽 어둠 너머에는 암벽에 가려진 마칼루가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발밑 깊고 깊은 낭떠러지에서는 구름이 고요히 흐르고, 돌풍에 휘말린 눈발은 황량하면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해발 8,511미터. 로체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아득한 비현실의 경지, 무한한 꿈의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듯했다.


-결국 우리가 해냈어!


조금 늦게 정상에 오른 등반대장 우태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로체야! 우리가 왔다! 드디어 올라왔다!


두 사람은 어깨를 힘껏 끌어안고, 철부지 아이들처럼 야호, 야호를 외치며 환호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정상의 설원 위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지독한 사투로 점철된 지난 7일간의 여정은 이 순간, 아득한 꿈처럼 가볍고 현실감이 없었다. 무슨 말로 이 감각의 온도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기쁨과 숭고함을 초월한 순백의 감정,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초현실적 떨림이었다.


이곳, 산소마저 극도로 척박한 고지에서는 인간의 감정 또한 무중력 속을 부유하며 그 경계조차 아스라이 흩어져갔다. 이 지구상에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고도가 존재하듯, 죽음의 계곡을 넘어 도달한 히말라야의 정상에서 인간의 감정은 점차 실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이 순간을 억지로 붙들려 하지 않고, 온몸으로, 온 감각으로, 정상에 선 감동을 고요히 흡수하는 것뿐이었다.


-베이스캠프에 무전을 쳐야겠군.


우태길이 무전기를 추켜들고 발신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이성호는 카메라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세계의 지붕이 첩첩이 뻗어나간 장엄한 풍경을 응시했다. 눈앞을 가득 채운 설산들은 묵묵히 침묵한 채, 인간 존재를 미세한 점처럼 삼켜버릴 듯 압도적이었다. 그는 북쪽에 우뚝 솟은 에베레스트를 배경 삼아, 웅장하게 솟은 설산의 봉우리들을 한 컷에 담았다. 이어 동쪽과 남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며 셔터를 눌렀다. 서쪽을 향해 마지막 인증 샷을 찍으려는데 아이젠 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리며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상체가 앞으로 기우뚱한 순간, 눈 속을 가르며 은빛으로 빛나는 가느다란 줄 한 가닥이 튀어나왔다.


-태길이 형! 여기 뭔가 있어요. 목걸이 같은데... 줄이 끊어졌어요.

-주위를 잘 살펴봐. 뭐가 더 있을지 모르니까.


무전기에서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릴 듯 말 듯 이어졌다. 배터리는 충분했지만, 우태길은 정체 모를 불안에 사로잡혔다.


-베이스캠프와 교신이 끊긴 것 같아.

-큰일이군요. 날씨가 변하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야 하는데...

-목걸이는 찾았어?

-잠시만요.


이성호는 장갑 낀 손으로 눈을 헤집었다. 차가운 알갱이 사이로 스치는 감촉이 문득 낯설고 날카롭게 다가왔다. 손끝에 닿은 건 작고 단단한 무언가였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지름 1센티미터, 길이 3센티미터 남짓한 은색 목걸이 통이었다.


-어? 이건... 서바이벌 키트네요?


초강력 알루미늄 소재의 서바이벌 키트는 비상 상황에 대비해 신원 확인 및 생존 정보를 담기 위해 제작된, 방수 캡슐 형태의 물건이다. 고산 등반자같이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일종의 블랙박스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마련한 가장 원초적인 수단인 셈이다.


해발 8천 미터, 그 정상의 끝자락에서 발견된 이 조그마한 증언의 실체는 누군가의 마지막 침묵의 언어일 수도 있었다. 히말라야 고봉의 무심한 눈 속에서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표면에 붙은 얼음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는 그 메시지를 확인했다. ‘DJ’라는 이니셜, 파란색 테이프, 그리고 로체봉 정상에 남겨졌다는 사실. 모든 퍼즐이 수수께끼처럼 떠올랐다가, 한꺼번에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건... 도준, 그 자식 거야.


우태길이 눈가를 떨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뭐라고요? 준이 형이요?


이성호가 놀라 되묻자, 우태길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파란색 테이프, 뚜껑에 새긴 'DJ'... 이게 확실한 증거야. 그 녀석은 모든 장비에 파란색 테이프를 감아두곤 했지. 자일에도 말이야.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어.

-그렇다면, 도준 형이... 정말 2년 전에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는 건가요?

-알파인 스타일로, 오로지 혼자서.

-그게... 정말 가능했다고요?

-그럼. 도준이니까. 허허.


우태길은 한숨처럼 짧게 웃었다.


오늘 두 사람이 오른 길은 노멀 루트였다. 에베레스트 쪽 베이스캠프에서 이어지는, 비교적 잘 알려진 코스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전 도준이 향했던 곳은 전혀 달랐다. 로체 남벽. 세계 최강의 등반가들조차 번번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아직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미지의 벽이었다.


-도준 형의 실종을 두고 말들이 많았잖아요. 로체 정상에 올랐을 거다, 아니다...

-그 지옥 같은 로체 남벽을 혼자 해치운 거지.

-완벽하게 초등 업적을 이루려면, 정상까지 갔다가 무사히 내려와야 하는 거잖아요.

-로체 남벽을 끝까지 올라온 자는 아직 아무도 없었어. 도준이 내려오지는 못했을지라도, 올라온 건 확실하잖아. 이 서바이벌 키트가 증명하는 거지. 무산소 최초 단독 등정이야. 결국, 도준이 혼자 해낸 거야.


그는 알루미늄 통을 손에 꼭 움켜쥔 채, 끝없이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설산들의 침묵과 그 차가운 광활함 속에서, 도준에 대한 기억과 그의 실종 이후 견뎌야 했던 참담한 시간들이 아른거렸다. 공기 속의 희박함마저 감정을 천천히 갉아먹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남은 것은 단 하나, 서늘하게 맑은 진실의 감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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