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덕포리 다리 앞에서>
Oil on canvas, 65.2×50.0cm, 2013–2014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집 어딘가에 문간방 하나쯤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자 오래전 아현동 우리 집 문간방에 살던 말괄량이 아가씨가 떠올랐다. 그 아가씨는 키도 크고 늘씬했으며 성격도 아주 명랑했다. 약간 튀어나온 커다란 입을 활짝 벌리고 웃던 그 시원스러운 미소가 아직도 생각난다. 오죽했으면 우리 엄마가 그 언니에게 ‘말괄량이 아가씨’라는 별명을 붙였겠는가.
나는 그때 초등학생이었는데, 어느 일요일이었다. 말괄량이 아가씨가 안채로 건너오더니 잠깐 텔레비전을 좀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전에도 가끔 우리 집 선풍기에 젖은 머리를 말리러 안채로 건너오곤 했었다.
언니와 나는 흑백텔레비전으로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코미디 재방송 프로그램을 시청 중이었다. 그런데 말괄량이 아가씨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따로 있었다. 번쩍거리는 허연 옷에 갈기 같은 장식을 단 백인 남자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화면은 요란하고 떠들썩했다.
남자 가수의 공연에 흠뻑 취한 말괄량이 아가씨는 소리를 빽빽 지르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마침 부모님은 출타 중이었다. 이런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언니와 나는 어서 빨리 말괄량이 아가씨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랐다. 평소 엄마가 텔레비전 시청을 엄격하게 관리했던 터라 우리에게는 모처럼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말괄량이 아가씨는 죽어도 그 백인 남자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봐야 했는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우리 역시 물러설 수 없었다.텔레비전은 우리 집 것이니 우리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할 도리밖에 없었다. 결국 말괄량이 아가씨가 한 가지 타협안을 제시했다. 서로 5분씩 프로그램을 번갈아 시청하자는 것이었다.
너풀거리는 반짝이 옷에 시커먼 구레나룻을 기르고 다리까지 떨어대는 그 백인 남자가 조금은 신기하기도 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 가수의 일거수일투족에 매료되어 괴성까지 지르며 난리법석을 피우는 말괄량이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그때 우리가 사이좋게 5분씩 번갈아 가며 시청했던 그 백인 가수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우리 세대는 어쩐지 엘비스보다는 비틀즈 쪽에 더 열광하는 문화 풍조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요즘 들어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에 가끔씩 필이 꽂히곤 한다. 뭐랄까. 약간 느끼하면서도 반항기 어린 그 목소리가 내게는 더 청춘의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청춘이란 과연 어떤 빛깔일까. 저마다의 청춘은 다들 제 나름의 모양새와 색채를 띠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목소리에는 샙 그린과 프렌치 울트라마린을 섞어 놓은 듯한 청춘의 빛깔과, 페인스 그레이에 약간의 번트 시에나를 더해 놓은 듯한 그늘이 함께 스며 있다.
그 시절 우리 집 문간방에서 일 년 남짓 살다 간 말괄량이 아가씨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어떻게 엘비스 프레슬리의 그 ‘역사적인’ 하와이 공연을 볼 수 있었겠는가.
그 시절 말괄량이 아가씨 덕분에 나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처음 발견했다. 음악 애호가로서 요즘 나의 관심은 BTS에 꽂혀 있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미’다. 일곱 멤버 모두를 사랑하고, 그들이 군에서 제대하기만을 학수고대해 왔다. ‘봄날’, ‘피 땀 눈물’, ‘블랙 스완’, ‘페이크 러브’, ‘FIRE’, ‘작은 것들을 위한 시’. 정국의 ‘이포리아’, V의 ‘Winter Bear’, 슈가의 ‘대취타’도 좋아한다. ‘ON’의 공연들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나는 지금 3월 21일 광화문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그날만큼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바로 출동할 계획이다.
그런데 요즘 뉴스 속 세상은 자꾸만 불안해 보인다. 먼 나라의 젊은 아미들 역시 같은 음악을 들으며 같은 설렘으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그저 모두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누군가의 열광은 언제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염되는 법이다.
말괄량이 아가씨가 내게 엘비스를 전염시켰듯이.
글과 그림이 있는/ 김미진의 오후 3시
https://blog.aladin.co.kr/731589167
#덕포리 #야외스케치 #엘비스프레슬리 #BTS #그림에세이 #artjour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