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스토리텔링에 푹 빠져있었다. 거의 한세기가 차이나는 시대인데도 각 등장인물이 짊어지고 있는 삶에 대한 고뇌와 그들이 처한 상황에 현대를 살고 있는 나를 대입시키게 되었다. 상류사회에 집착한 엘리엇은 교양과 명예를 얻었지만 허식에 찬 삶을 살았고, 평생 래리를 사랑하지만 물질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레이와 결혼 후 행복한 삶을 택했다고 자신하는 이사벨,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십수년을 떠돌아다니다 결국 미국으로 돌아가는 래리 등 모든 등장인물들이 주인공이자 나름의 합당한 목적의식을 갖고 인생을 살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어찌보면 등장인물 모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미워할 수 없고 매 캐릭터에 수긍하게 되는 것은 서머싯 몸의 탁월한 글솜씨뿐만 아니라 어색한 부분없이 쉬이, 편안히 읽히도록 번역해주신 번역가분의 능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p.280-281
“... 래리에 대한 네 사랑도, 너에 대한 래리의 사랑도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사랑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단순한 거야. 다행히 네 경우엔 비극적인 결말을 맺진 않았지. 너는 부유한 남자와 결혼해서 잘 살았고, 래리는 세이렌이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밝혀내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다녔으니까. 너희들 사이엔 열정이 개입되지 않았어.”
“열정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열정은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려. 그러고 나면 수년 동안 인생을 허비했다는 걸 깨닫고 비참한 기분이 들겠지. ...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의 꿈을 모두 걸었음을, 껌 한 쪽만도 못한 상대에게 영혼을 전부 쏟아부었음을 깨닫는 비참한 순간이 찾아오는 거지.”
p.334
랜더 (1775-1864, 영국)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그 다음으론 예술을 사랑했노라.
삶의 불에 두 손을 녹였노라.
불길이 꺼지려 하니, 나는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p.445
“…개인적으로 저는 어떤 대상을 숭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잔인한 신들에 대한 기억의 잔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잔인한 신들의 비위를 맞춰 춰야 한다는 기억의 잔재라는 것이죠. 신은 제 안에 있는 게 아니라면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고 저는 믿거든요. 그렇다면 저는 누구를 혹은 무엇을 숭배해야 하는 걸까요? 저 자신일까요? 사람들의 정신적인 발달 수준은 저마다 다르죠. 그중 인도인들은 나름의 상상력을 통해 브라마와 비슈누, 시바, 여타의 수십 가지 이름으로 알려진 절대자의 현시를 발전시킨 겁니다. 절대자는 세상의 창조자이자 통치자인 이슈바라(*힌두교에서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지고의 실재인 브라만과는 구별되는 인격적이고 내재적인 신) 안에 존재할 수도 있지만, 땡볕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꽃을 따다 바치는 소박한 물신 속에 존재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인도의 그 수많은 신들은 개개의 자아와 하나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수단에 불과한 셈이죠.”...
“자네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확고한 믿음에 매료되었는지 궁금하군.”
“그건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저는 오래전부터 종교를 구원의 필수 조건인 것처럼 떠벌리던 종교 창시자들에 대해 서글픈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마치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야만 자신도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들을 생각하면 고대 이교의 신들이 떠올랐죠. 독실한 신자들의 봉헌물이 없으면 힘을 잃고 마는, 그런 신들 말입니다. 아드바이타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죠. 그저 실재에 다가가고자 하는 열렬한 열망만을 요구할 뿐입니다. 신이라는 것도 기쁨이나 고통처럼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가르치죠. ... 사실, 저는 인식을 통해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가장 어렵고도 고귀한 구원의 수단은 단연 인식이라는 점은 결코 부인하지 않았죠. 인식이라는 수단은 인간의 가장 귀한 능력, 즉 이성이니까요.”
p.464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작게나마 영향력을 갖고 있게 마련이죠. 연못에 돌 하나를 던져도 이 우주는 돌을 던지기 전의 우주와 똑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도의 성자들이 헛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에요. 그들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과도 같은 존재죠.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이상과도 같은 존재예요. 보통 사람들은 결코 그런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그들을 우러러보고 존경하면 그들에게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죠. 한 인간이 고결하고 완벽해지면 그런 성품의 영향력이 널리 퍼져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이끌리게 됩니다. 제가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삶을 이끌어 나가다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죠. 물론 영향이라고 해 봐야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작은 물결이 이는 것처럼 아주 미미할 겁니다. 하지만 하나의 물결은 또 다른 물결을 일으키고, 그것은 그다음 물결로 이어지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