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동안 쉬지 않고 맨몸으로 바닥을 밀면서 한 길로 줄곧 기어온 달팽이(蝸牛)가 있습니다.
비록 느리지만 쉼 없는 움직임이었습니다. 맨 몸으로 기어온 바닥 뒤로는 가늘지만 뚜렷한 길이 만들어졌고, 그 길은 언젠가 분명 조금씩 넓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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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체질의학은 어떻게 보면 블랙박스와 같았습니다. 실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내부의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은 없는 그런 未知의 상자. 이를 직접 설계하고 만든 사람은 세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자의 유용함을 알게 된 이들은 설계자의 뜻은 이런 것이다라고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기에만 급급할 뿐, 8체질의학이 과연 어떤 체계로 이루어져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소홀했었습니다.
설계자가 직접 만든 체계적인 매뉴얼이 없었다는 것이 첫 번째 비극입니다. 이는 지난 세월 한의학의 슬픈 역사이기도 합니다. 임상으로나 학문적으로 탁월한 한의사가 많이 나왔음에도 학문의 틀을 갖추지 못하여 전수되지 못하고 사장되어 온 비극의 역사.
사상의학이 한의학의 정수로 남게 된 것은 이제마의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그가 남긴 <동의수세보원>이라는 저술로 인해 100년 넘게 지속되며 재발견되고 계승될 수 있었습니다.
역사는 오로지 기록으로서 남습니다. 제자백가가 있었지만 후대에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기록과 저술이 있었던 사람 뿐 입니다. 붓다도 기억력 좋은 제자 아난이 없었다면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8체질의학이 사상의학과 더불어 한의학의 독자적인 한 축이 될려면 반드시 그에 걸맞는 저술이 필요합니다. 이에 이강재 원장은 20년간 8체질의학에 몰입하여 산재된 자료를 취합하고 정리해왔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검증을 해왔습니다. 흡사 고대 유물을 발굴하면서 새로 역사를 짜 맞춰가는 작업과도 같았습니다.
첫 번째 결실이 <학습 8체질의학1,2>입니다. 8체질의학의 입문서 혹은 원론서로서도 거의 유일한 책입니다. 하지만 8체질의학에 입문을 하더라도 실제 임상에서 8체질을 능숙하게 하기란 무척 힘든 일입니다. 유일한 진단체계인 체질맥진의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아예 진입조차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문헌상 나와있는 체질맥도 또한 견해가 분분합니다.
그런 연유로 다음 책은 바로 <체질맥진 KEY OF ECM>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목처럼 체질맥진이야말로 8체질의학의 문을 여는 유일한 KEY입니다. 잘못 깎은 혹은 어설프게 베낀 열쇠로는 문을 열 수 없습니다. 꼭 맞는 KEY여야만 합니다. 어설프게 배운 맥진으로는 결코 8체질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저자는 단언합니다. 체질맥진은 결코 독학할 수 없다라고.
책으로 독학할 수 없는 체질맥진이라면 저자는 어떤 연유로 출간을 하게 되었을까요?
이 책은 체질맥진이라는 지극히 실용적인 테마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특이하게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체질맥진이 성립하게 된 배경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랬다더라가 아닌 지극히 실증적인 자료를 꺼내놓으면서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8체질과 체질맥진의 성립과정에 대해서 실을 꿰어서 이렇게 내어놓았습니다. 그 과정은 흡사 추리소설을 읽듯이 흥미진진합니다.
실용적인 목적으로만 책을 썼다면 결코 이렇게 쓰진 않았을 겁니다. 체질맥진은 이런자세로 이렇게 맥을 보면 되고 요령은 이렇게 해야해... 이러면 금방 끝나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체질맥진 KEY OF ECM>은 8체질의학의 뼈대를 하나하나 세워가는 작업을 스스로 하겠다고 저자가 선언한 책이라고 보여집니다. 어떤 이론이든 갑자기 튀어나온 완전 새로운 것은 없고 8체질의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베이스가 없는 학문체계는 종교적 도그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강재 원장은 8체질의학을 도그마의 차원에서 학문의 차원으로 진일보하는데 인생을 걸고 있는 듯 보여집니다.
독학이 불가능한 체질맥진에 대해서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자세한 책이 나왔습니다. 이제 8체질의학도들은 <체질맥진 KEY OF ECM>을 지도와 나침반삼아 자유롭게 임상의 바다에서 무수히 부딪히고 깨지면서 끝내는 먼 망망대해를 능히 탐색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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迷道. 필명처럼 저자가 8체질에 몰입하며 때론 헤메이기도 하면서 온몸으로 바닥을 밀면서 힘들게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가는 이유는 아마도 8체질의학을 공부하는 후배 한의사들의 분발을 촉구함이 아닐까 합니다. 이젠 메아리가 될 응답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