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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시스의 서재
  • 그래도 우리의 나날
  • 시바타 쇼
  • 13,050원 (10%720)
  • 2018-12-10
  • : 2,746
P.83 이윽고 연휴도 끝나고 이전처럼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지. 그러나 나는 이제 모든 게 귀찮게만 느껴졌다. 겉으로 보이는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모든 것이 귀찮았다. 굳이 그것을 말로 표현해보자면, 결국 죽을 때가 돼서 생각나는 일이 과거에 저지른 배신이라면 지금 생활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지만, 실제로 내가 느끼게 된 것은 그런 논리로도 따질 수 없는, 사는 것에 대한 귀찮음이었다. 날마다 일하는 것도 귀찮고 아야코 씨를 음악회에 데려가는 것도 귀찮았다. 아니,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식사하는 것도,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조차도 귀찮았다. 그것은 내가 또하나의 나와 소리가 통하지 않는 유리벽으로 차단되어, 저쪽에 있는 나는 종일 아무 의미도 없이 뭔가를 하고 있지만, 이쪽의 나는 그걸 그저 우울하게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매일 속에서 죽음이라는 생각이 서서히 내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다.

​P.85 그저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이 나른한 기분으로 나자신이 아닌 무엇인가에 의해 팔다리가 움직여지는 듯한 느낌으로 수면제를 사 모아서 기차에 탄 것이다. 그 나른함, 삶에 대한 귀찮음과 죽으면 모든 것이 편해질 거라는 속삭임이 한데 녹아 있는 나른함. 이제 더는 거스를 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

​P.96 사람들은 믿는다는 것은 아름답다고 말하지. 하지만 난 믿는다는 것은 어딘가 추하다고 생각해.

​P.124 그러나 만약 내가 아주 조금 후회한다 해도 설령 그런 게 만약있다 해도, 너한테는 나를 경멸할 권리 같은 건 없어. 너는 남자니까. 너는 여자가 뭔지 아니? 아니, 절대 알지 못할 거야. 남자는 알 수 없어. 아니, 알 필요도 없을 테지. 남자는 자신이 바라는 곳으로 가. 그걸로 끝이야. 그건 그것대로 좋아. 여자도 원해 그 속으로 들어가는 거니까. 다만 그 결과는 내가 짊어져야만 해. 그것도 좋아. 그건 남자에게 통보해야할 사항이 아니야. 금욕은 언제나 비참하고 어두운데, 그리고 욕망을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사는 것은 여름 바다에 빛나는 태양처럼 밝을 텐데, 그 밝음의 결말에 이런 굴욕을 당해야 하는 건 대체 어째서일까, 마지막은 언제나 여자가 처리해야만 해. 처리. 얼마나 굴욕적인 말인지. 나 자신이 처리되다니. 너는 모르겠지. 남자는 몰라.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는데 일단 스토리가 너무 재밌고 문체가 좋아서 술술 읽혔다. 도입부가 헌책방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묘사가 너무 감각적이여서 반할 정도였다. 그래서 아, 정신적이고 금욕적이고 철학적인 삶을 다룬 소설인가 보다 하고 읽어나갔는데 웬걸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다. 일본 소설 답게 자살하는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역시나 1950년대 여성의 삶은 비참했고 (유코라는 여자는 주인공으로 인해 자살한다. 세쓰코는 주인공의 자신을 향한 무관심에 지치고 실망하여 떠난다.) 남성들 대부분은 여성에 대해 왜곡된 폭력적이고 안일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가령 여성이 남자와 손만 잡아도 더렵다고 생각하거나 여성은 자의식을 가지고 학문에 정진하는 성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를 지나는 여러 인물들은 사회혁명에 자신을 투신하지만 결국 그 이데올로기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실격당하게 된다. 자신의 삶의 가치와 신념이 사라지자 삶의 이유를 잃고 자살하는가 하면, 아예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인물들도 있다. 이 소설 내내 혼란스럽고 비관적인 정서가 흐른다. 그들은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부유한다. 삶을 계속해서 걸어가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애쓰지만 인물들의 대부분은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지치고 떠나고 자살한다. 파열하는 청춘을 그리고 있지만 이소설을 그저 청춘의 방황으로서만 읽는것이 아닌 인생이라는 영역으로 확장하여도 부족함이 없다. 삶은 결코 안정적인 것이 아닌 늘상 흔들리는 것이니까.

​ 여튼 재미나게 읽었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게 진행되어서 막힘없이 술술 읽힌다. 허나 그 안에 의미하는 것들은 계속해서 곱씹어 생각하게 만들정도로 묵직하다. 과연 자의식이란 무엇인지 신념을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의식과 신념이 명료하고 딱 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하게한다. 인간은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있어야만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이 소설에서 인물들이 내내 자신에게 물었던 것. ‘죽기전에 과연 지금까지의 내삶에서 무엇을 떠올릴까’라는 질문에 누구도긍정적인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삶의 의미를 치열하게 묻지만 결코 당위를 찾지 못했던 인물들. 삶의 의미라는 거창한 신념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무엇일까? 죽을때까지 그것을 묻고 또 물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테지.

마음이 무겁고 씁쓸하고 화가 났던건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삶이 어렵다는 것.

마지막으로 헌책방과 중고책에 대한 묘사가 정말 매력적이다. 이소설에서. 카페에서 헌책방 부분을 읽었는데 정말 환상적인 느낌이라서 순간적으로 너무 행복한 시간 이었다.

P.14 어느 찬비 내리는 가을 저녁 무렵, 나는 교외에 있는 K역 옆 헌책방에 들렀다. 그달 마지막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헌책을 둘러보다가, 책꽂이 위쪽 칸에서 아직 새것 같은 H전집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지난달인가 지지난달에 완결된 전집이었다. 별로 읽히지 않는 H의 전집은 흔하지 않은 만큼 값도 비쌌다. 신간이 바로 헌책방에 나오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한 애착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애초에 사지 않았을 H전집이 출간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헌책방 책꽂이에 꽂혀 있다는 것은 역시 조금 기이하게 느껴졌다.



P.15 그런데 지금 그 새책을 손에 들고 헌책방의 낡은 책꽂이, 무너질 듯한 책더미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는 뭔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H전집이라기보다는 그것이 한 질이라는점. 내 앞에 꽂혀 있고 내 손에 들려 있는 한 질이, 혹은 그 한 질이 가진 일종의 기이한 분위기가 내 마음에, 아니 내 존재 자체에 휘감겨드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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