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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자들의 수프
- 정상원
- 13,950원 (10%↓
770) - 2024-07-31
: 624
여행에 딱 한권의 책만 가져간다. 그 이유는 그 여행지 근처 서점에서 책을 사는 재미를 알기 때문이다. 일주일 넘는 이번 제주 여행에 가져간 책은 '글자들의 수프'이다.
이 책을 가져간 이유는 우선 책이 가볍고, 책과 함께 쓴 일기 이기 때문에 꼭 한번에 다 이어서 읽을 필요가 없고, 내용이 어렵지 않아 술술 읽혔기 때문이다.
나와있는 책들은 현기영의 부러진 숟가락 부터 박완서의 봄비와 쑥전까지 33권이나 된다.
익숙지만 진짜 스토리는 몰랐던 작품부터 딱 한 줄로 감동을 자아내는 작품, 꼭 읽어봐야겠다고 메모하게되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고 그 책과 함께 쓰여진 작가님의 글을 더 좋았다.
"그것 보라,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지 않엠시나. 그러니까 먹는 것이 제일로 중한 기다. -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 -"
밥의 온기에 들기름은 고소하게 윤이 오르고, 설게 익힌 나물들은 그제야 완연히 누그러지며 맛의 빗장을 연다. 헛제삿밥도 제사의 법도를 따르니 마늘과 생각, 고추장은 금기다. 은근하게 우려낸 나물 채수로만 슴슴하게 비벼 먹는다. 제사 나물에 비벼 먹는 미지근한 잿밥은 임종 직전 처음으로 만져본 어르신의 뺨, 그 차분한 온기와 꼭 같았다."
와... 감탄이 나온다. 내가 먹어본 내가 맛있게 먹었던 그 헛제삿밥이 그래서 맛있었나. 그 슴슴한 맛에 온기가 들어있어서
내가 처음 헛제삿밥은 20년여년전 대학생 때 봉사활동으로 초등학생 아이들을 데리고 떠난 안동 여행에서 였다. 정신없이 아이들을 앉히고 겨우 한숨 돌려 한입을 떠넘겼는데 허기였는지 피곤함이었는지 그 맛이 너무 좋아서 가끔 생각이 났다. 그 때 그 마음이 온기 였구나 편안함 이었구나. 그리고 다시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이 쉐프이다 보니 음식에 대한 표현에 진심이신데 그 표현력이 너무 뛰어나서 빵을 먹고 있다가 갑자기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지고, 커피를 마시며 읽다가 감자전에 침을 훔치게 된다 .
"4.3사건의 아픔을 담은 '지상의 숟가락 하나'는 살아남의 자의 슬픔을 솔직하게 고백해 독자를 그 시간, 그 장소로 데려간다"
내가 4.3사건에 대해 안것을 결혼 이후였다. 들어보긴 하였으나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그 사건은 그 일을 직접 겪으신 아버님을 통해 들을 수 있었고, 지금도 소주한잔에 넋두리 처럼 하시는 가슴아픈 술안주였다.
본인도 어린 나이였던 누나는 5살의 아버님을 산속으로 데려가 푹 파인 구멍에 몸을 숨기고 낙엽으로 위에 깔아 절대 나오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절벽에서 대치하다 머리에 치마를 덮고 바다로 투신하였다. 확인된 사망자 10,000명(추정 80,000명)이라는 이 끔찍하고도 아픈 사건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나마 지금은 4.3 공원도 생겨 유가족들이 가볼 수 있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도 맛있는 감자전에 대한 표현이라니..
단아하고 수려하다는 말이 너무나 공감된다. 밖에서 파는 감자전으로는 이 맛의 표현이 와닿지 않고 꼭 집에서 해먹어야지만 알 수 있는 표현이었다.
"손님이 돌아가고 식탁 위 커피잔을 치우는 일은 요리사의 마지막 의식이다. 카페의 커피가 쉼표라면 식당의 커피는 마침표다. 그러다 보니 요리사에게 커피는 성적표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스스로 음식이 만족스럽게 지어졌을땐 커피를 내래는 손길이 가볍다."
쉼표도 마침표도 되는 커피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서로의 관계에 따라 커피잔을 기울이는 태도도 다르고, 그래서 남겨진 커피 자국도 다르다는 표현에 아.. 하는 공감과 탄식이 나왔다.
"뻘을 앞마당에 펼쳐놓은 수많은 고장 중 벌교가 꼬막의 이름을 소유하게 된 것은 소설 '태백산맥' 덕이다. 뻘을 토해내는 듯한 조정래 힘찬 필치는 벌교 꼬막을 대한민국 수산물 지리 표시 1호로 만들었다."
인사동에 '여자만'이라는 한정식집이 있다. 남자부장님들이 앉을때마다 여긴 여자만 오는곳 아니냐며 재미없는 농담으로 시작되는 곳이긴 한데 실제 여수의 지역이름이다.
이곳에서 꼭 꼬막을 먹곤하는데 남도 음식들을 먹을때마다 소설 '태백산맥'이 생각났을 정도이니 책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다.
이 책은 위에 소개한 공감글 외에도 단테, 쥐스킨트, 백석, 황석영, 이상, 박완서 작가 등 좋은 작가들의 좋은글들을 볼 수있으니 하나하나 천천히 수프를 음미하듯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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