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부터 심오함이 느껴지는 책이다. 그런 독특한 느낌에 이끌려 선택한 책이다. 그래서일까, 막연하게 책을 받기 전 두꺼운 두께일 거라고 지레짐작을 했다. 그러나 받고 보니 사이즈도 작고 두께도 얇아서 당황스러웠다. '금방 다 읽겠구나'라고 생각하고 페이지를 넘겼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생각보다 페이지를 빨리 넘길 수 없었다. 페이지 하나에, 한 문장에 저자의 깊은 생각이 담겨 있어서 섣불리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저자가 지금까지 장애인으로서 살아오면서 느낀 것들과 자아성찰을 정리해서 힘겹게 글로 옮겨낸 작업이라 생각하니 더더욱. 그렇다고 해서 내용 전체가 장애인의 삶을 쓴 것도 아니다. 꼭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일반인의 입장에서도 누구나 반드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삶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왠만하면 책을 깔끔하게 보관하기 좋아해서, 글에 밑줄을 잘 긋지 않는다. 이 책은 신기하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밑줄 좍 긋고 싶은 문장이 가득했다. 내용 하나하나가 정말 다시 되새김질하게 된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 누군가에겐 너무나 힘겨울 때가 있다. 나의 경우엔 듣지 못하기에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 너무나 힘겹다. 그래서 필담이나 문자로 보는 것이 좋은데, 막상 사람들은 말로 소통하기를 좋아하고 나 한 사람을 위해 필담을 하는 것을 매우 번거로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노동이라고 생각하고 고집스레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한다. 요즘은 TV에서 자막이 나오도록 배려를 하지만, 이것도 따로 기계가 필요해서 돈이 많이 든다. 아직도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가면 오로지 귀로 들어야만 아는 정보가 많다. 그렇기에 청각장애인은 수많은 정보에서 소외된다. 정보를 알기 위해 남보다 더 열심히 인터넷이나 활자정보를 뒤질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른 시간 소모와 체력 소모는 만만치 않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 행복해지기 위해 무언가의 시도를 하는 것. 저자는 이것을 '즐거운 전투'로 부른다.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고 때론 너무도 힘겨울 수 있는 노역을 해내기 위해서는 힘과 원천이 필요하다. 바로 불꽃처럼 간직하고 있는 의지다. 때론 결핍은 하나의 원천이 될 수 있고 좀더 큰 행복을 향한 도약대가 될 수 있다. 가진 게 없기에,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활용하는 노력을 하는 것. 그것을 방해하는 것을 절망이라고 한다. 희망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인간의 유일성에 대하여- 이 페이지에서는 사회적 약자라면 더더욱 와닿는 내용일 것이다.
사람들이 '장애인'이라 너무나 쉽게 빠른 판단을 하여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즉 한 사람, 개인을 그 어떤 말로 설명해도 부족하고 좀 더 깊이 알아도 모자란데, 겉모습만 보고 '이 사람은 장애인이니까 공부를 잘 못 할 거야' '이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겠지' 라는 섣부른 예상을 해버린다. 개인의 개성과 다양성을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저자조차도 '장애인=불행한 사람'이라는 확고하고 입증된, 반박할 수 없는 법칙이라 믿었다고 한다.
나 역시 청각장애인으로 살면서 이 법칙에 얼마나 얽매였던지. 문제는 이런 법칙이 희망과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다는 것이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라고 해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정말로 그랬다. 물론 객관적으로 따지면 삶의 질은 몸이 불편하지 않은 게 더 높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인간을 저말로 한 단어에 한정할 수 있을까? 인간은 단어 하나로 쉽게 설명할 수 없다. 물론, 문장이어도, A4용지 1장에도 다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인간이란 그 존재가 복잡하고, 신비롭다. 그러나 선입견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워서 이를 다 덮어버린다. 이러한 겉치레 때문에 단순하고 편견 없는 접근이 어려워진다. 휠체어, 시각장애인용 흰지팡이. 오로지 이런 것만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그것을 잘 다루는 장애인을 보려고 하는 시선이 없다. '불행함'의 단어의 영향이 커서 긍정적인 것마저 다 덮어버리기 때문일까?
나도 다른 장애인들을 그만 편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때가 있었다. 물론 그런 편견은 그들과 함께 같은 회사에서 일해보니 쉽게 깨졌다.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에 탄 사람도 평탄한 길만 있으면 어디든지 바퀴를 굴러 전혀 불편하지 않게 취미 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다른 장애인들도 마찬가지였다.어제 TV에 나온 드라마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때로는 사소한 싸움을 하기도 하고, 농담을 하며 웃기도 한다. 모든 것이 일반인의 생활과 별다를 바 없었다. 때때로 장애로 인한 불편함이 힘겨운 것이 얼굴에 보일 때가 있었으나 그것도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들에겐 단지 '결핍'일뿐 자신의 생활에 많은 것을 차지하진 않았다. 그들도 보통 사람과 같이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고, 취미 생활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고의로 심술궂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말을 알고 보면 상처와 실패의 좌절이 있기에 심술궂게 된다는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몽둥이로 때렸다. 그럼 무엇을 원망해야 할까? 적어도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몽둥이가 아니다. 상처가 바로 죄인이다. 그래서 옛말에 관용하라는 권유가 많은 것일까?
타인과의 교류가 때론 발전에 극심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남들의 놀림. 판단. 단죄를 받는 희생자가 될 수 있기에, 그래서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피하다 보면 결국 누구를 사랑하는 눈마저 질끈 감아버린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때론 남에게 의지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서는 나도 모르게 뜬금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철학적이고 함부로 옳다 나쁘다라고 단정짓지 않고 독자들에게 판단을 맡긴다. 그리고 생각하게 만든다. 나 자신과, 인간이라는 직업을.